공덕은 문을 닫기 전, 거실 안으로 고개를 넣어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눈으로 흘겼다. 공덕이 상황을 눈치챈 것은 크기가 줄어든 발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들리지 않는 발소리부터였다. 공덕은 팔목을 채 덮지 못하는 셔츠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저렇게 나올 줄 알았으면, 외투라도 챙기고 내려오는 건데.”
공덕은 고개를 다시 현관 쪽으로 뺀 다음, 등대의 열쇠를 챙기고서 문을 열었다. 몸이 날아갈 듯한 강하고도 시끄러운 바람과 얼음장 같은 추위. 섬의 아침은 따뜻함을 머금은 고요한 집과는 딴판이었다. 공덕은 셔츠의 옷깃을 세워 올린 뒤,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고서 서서히 발걸음을 앞으로 내렸다. 필요치 않은 고통, 그리고 인내. 문밖의 추위와 맞닥뜨린 공덕은 자신이 그러한 것들을 왜 감내해야 하는지 문득 화가 치솟았지만, 그에 대한 이유를 스스로 너무도 잘 알았다. 남현, 그분 하나를 위해서임을. 눈앞에 떠오른 이유와 마주한 공덕은 그를 외면하기로 했다. 외면은 공덕이 즐겨 쓰는 방법이었다.
“정말 춥군, 정말 너무한 추위야.”
말을 한 공덕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크게 뜬 눈으로 무언갈 찾듯이 이리저리 시선을 옮겨 나갔다. 공덕은 다른 것이 필요했다. 감각을 옮길 다른 것이. 그리고 공덕은 머지않아 그들을 하나씩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래, 섬이라고 안 될 것도 없지.”
공덕은 발아래를 보며 말했다. 별것 없어 보이는 길옆, 뭉텅하게 쌓여 있는 낙엽들. 공덕은 그것을 응시했다. 그리고 속으로 자기만의 이미지를 창조해 나갔다. 똘똘 뭉친 낙엽 사이로 삐죽빼죽 튀어나와 있는 나뭇가지. 그를 발견한 공덕은 기쁜 듯이 말했다.
“그렇지.”
“저건 무덤이야. 낙엽들의 무덤.”
공덕은 낙엽들이 고개 뒤로 넘어가, 보는 것이 힘들어질 때까지 그곳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다음 것을 찾아 발걸음을 내렸다. 공덕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까악-’
공덕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빛 영롱한 까마귀 한 마리. 까마귀는 나무 위에 앉아 섬 주변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공덕이 나무 가까이 다가오자, 가지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했다.
“그래, 다음은 네가 좋겠구나.”
공덕은 또다시 속으로 까마귀를 상대로 자신만의 이미지를 창조해 나가기 시작했다. 마른 가지 위, 홀로 퍼덕이는 모습. 어려웠다. 공덕은 다른 곳에서 이미지를 빌려 왔다. 거미줄이었다. 바람에 날려 가고, 남겨진 한 가닥의 거미줄. 공덕은 까마귀가 그 한 가닥의 거미줄에 걸려 있다고 가정했다. 그 뒤는 쉬웠다. 자신이 얼마만큼의 추한 모습을 보이는지도 모른 채 홀로 허덕이는 모습. 겨우 한 가닥의 거미줄에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다는 상상. 이미지를 완성한 공덕은 다시금 미소와 함께 말을 뱉어냈다.
“고작 거미줄 하나에 버둥대는 꼴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공덕의 상상은 거기까지였다. 공덕은 등대의 유리창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공덕은 내달렸다. 공덕은 허겁지겁 집에서 집어 온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내 들었다. 공덕은 한 번에 자물쇠를 열었다. 매끄럽지 못한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바닥에 떨어졌다. 공덕은 발 중앙에 떨어진 자물쇠를 줍지 않았다. 공덕은 곧장 등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도 그리 따뜻하진 않군.”
등대의 1층에도 바깥과 같은 한기가 들어차 있었지만, 양이 달랐다. 2층에서 내려오는 따뜻함 때문이었다. 공덕은 그 순간, 안심 엇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어젯밤의 밀코바가 불을 올려놓는다는 이야기는 연기가 아니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공덕은 계단을 바라봤다. 2층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공덕을 고민에 빠뜨렸다. 지금 그대로 1층에서 추위를 피하다 약속 장소로 나갈 것인지, 2층으로 올라가 연희의 상태를 확인할 것인지. 공덕에게 내재되어 있던 반발심은 발휘되지 않았다. 공덕은 계단을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속마음을 인정하는 목소리로 말을 뱉어냈다.
“이 앞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야.”
생쥐가 알려 준 시간이 되었다. 시간을 새고 있던 공덕은 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나가면 되겠군.”
공덕은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양손을 비벼 온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등대의 문을 열었다. 자물쇠를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텅 비어 있는 하늘로 검은 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생쥐의 시간은 정확했다. 공덕은 천천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헬기 안의 생쥐가 공덕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헬기가 섬에 착륙하고, 칼바람이 멎고 나서야 공덕은 손을 들었다. 조종석에 앉은 생쥐의 손이 여전히 펄럭였다. 공덕은 한심하다는 듯 생쥐를 향해 고갯짓했다.
“회장님.”
공덕이 남현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남현의 눈은 감겨 있었다. 공덕은 조금 더 강한 힘으로 다시금 남현을 흔들었다.
“회장님.”
“콜록.”
남현이 기침하며 공덕의 손을 뿌리쳤다.
“도착했습니다.”
눈을 뜬 남현이 공덕을 노려봤다. 퀭한 눈 주변으로 산짐승과도 같은 살기가 덮여 있었다. 공덕은 뻗친 손을 빠르게 거둬들였다. 남현은 가볍게 목을 돌린 뒤, 벨트를 풀고서 옆에 있는 장우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공덕을 향해 두꺼운 외투 하나를 던지며 말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넌 농담 듣는 법을 좀 배워야 해.”
남현은 생쥐의 어깨를 강하게 툭 치고는 헬기에서 몸을 내렸다. 공덕은 재빨리 남현이 건넨 옷을 둘렀다.
“여전히 좋은 곳이군.”
남현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대답한 공덕은 헬기 안의 생쥐를 향해 손짓했다. 생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섬의 안자락으로 들어가는 둘에게로 등을 떠미는 듯한 바람이 일었다.
“어제는?”
“큰일은 없었습니다.”
“그래? 작은 일은 무엇이고?”
남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공덕은 그에 대처할 만큼 머리 회전이 빠르지 않았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저 자신이 잠시 놓쳤던 게 있었을 뿐.”
“내가 알아 두어야 하는 일인가?”
“해결해 놓았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의 선처럼 이어지던 둘의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공덕은 그러한 일에 익숙하단 듯이 그의 보폭에서 벗어나지 않는 데에 집중했다. 그리고 둘은 금방 등대에 도착했다. 공덕은 바람에 날리고 있던 외투의 깃을 정리하며 남현의 앞으로 튀어 나갔다. 공덕은 남현의 얼굴을 확인하며 말했다.
“들어가시겠습니까.”
남현이 공덕의 손에서 떠나, 등대의 아래에서 위까지를 눈으로 살폈다. 그리고 등대의 제일 위쪽까지 눈을 올린 남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등대에 반사된 빛을 남현은 정통으로 맞고 있었다. 공덕은 가만히 기다렸다.
“너보다 나이가 어려.”
그를 들은 공덕은 문의 손잡이에서 손을 내렸다. 그러자 남현이 공덕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환기가 필요하다고 해서 말이야.”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남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랬나.”
“그러나, 점찍어둔 사람이 있다는 것까지는 몰랐습니다.”
“아, 그건 아니야. 내가 그렇게 치밀한 사람은 아니거든.”
“그럼…”
남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집의 하녀들 사이에 유독 어린 친구가 있었는데, 내가 바라던 인간상과 교묘하게 맞아떨어졌어, 라고 말하면 네가 이해하려나.”
“아니요.”
“그렇지? 두 사람은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지. 나이가 어리다고 너무 미워하진 말게. 연희가 있던 자리에 세월만 바뀐 거니.”
“나이가 몇입니까?”
공덕은 물었다. 남현이 한 손에 들린 장우산을 뒤로 돌려 등을 받치듯 양손으로 움켜쥐며 답했다.
“열아홉.”
공덕은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놀람, 까마득함, 복합적인 감정들이 공덕을 뒤흔들었다. 공덕은 말하고 싶었다. 그런 꼬맹이의 무엇이 당신을 사로잡았냐고. 대체 그 아이의 무엇이 평생을 바친 연희를 허송으로 만든 것이냐고. 공덕은 안쪽 입술을 깨물었다.
“공덕아.”
남현이 말없이 서 있는 공덕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남현은 공덕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공덕의 어깨가 순간 크게 들썩였다.
“걱정하지 마라. 괜찮으니까.”
남현이 공덕의 어깨를 누르며 말했다. 공덕은 침묵했다. 그리고 남현이 등대의 문을 빠져나가며 말했다.
“따라와.”
공덕은 남현의 옆이 아닌 뒤에 서서 그를 뒤따랐다. 남현은 그 뒤로 공덕을 향해 말을 건네오지 않았다. 둘의 걸음은 섬이 뉘엿할 무렵에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