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었었구나.”
시안은 눈을 뜨며 말했다. 방은 컴컴했다.
“아무도 날 안 찾았나 보네. 여태껏 잘 잔 걸 보니.”
귀에 닿을 듯한 입꼬리와 톤이 올라간 목소리. 시안은 연희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이내 얼굴색을 바꾸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딸은 모르고, 나는 안다. 아니지, 이 집 사람들 아무도 모르는 거지. 회장과 나, 정말 이렇게 두 사람만 아는 건가?”
시안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오른손으로 방의 벽을 만졌다. 가현에게 맞은 뺨, 하녀들에게 돌고 있는 소문, 사라진 연희, 처음으로 생긴 아군. 갖가지 생각들이 방을 도는 내내 시안의 발목을 부여잡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오늘은 이대로 있으면 되나.”
그리고 시안은 뒤로 숨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가 볼까.’
그러나 그것은 생각에서 그쳤다. 시안은 나가지 못했다. 시안은 방문 대신 빛이 들고 있는 창가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어두운 벽지의 색과 대비되는 재스민 색의 커튼. 시안은 커튼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그 사이로 밖을 봤다. 창밖은 밝음과 어둠이 공존했다. 그들 중 유독 눈에 띄게 밝은 자리가 있었는데, 그곳의 등불은 색이 조금 더 짙었다. 분수대 근방이었다. 시안의 눈은 자연스레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옮겨 갔다. 시안이 말했다. 그리고 시안은 반대쪽 손을 뺨에 올렸다. 뺨에 여전히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무례했어. 그렇게까지 갈 상황도 아니었는데.”
그리고 시안은 계속해 말을 이어 갔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것도 정말 소름 돋는 상황이었어. 아무도 모르게 의식이 없는 자기 아내를 집 안에 안치시켜 놓은 거잖아.”
“아니지. 문제는 그게 아니야. 중요한 건 거기에 누워 있는 이유야. 이유가 있을 수 있나? 대외적으로 아내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가 있지?”
생각을 부풀려 나가던 시안은 불현듯 떠오른 한 가지 생각에 양팔로 자신을 감싸안았다. 시안의 목에 굵은 닭살이 올라온 것이 보였다. 시안은 떨고 있었다. 시안은 떠올린 것이다. 자신이 집사 자리에 앉기 전, 그전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세상에…”
시안이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20년 넘게 어미이다시피 붙어 다니며 그녀를 돌봤던 여인, 연희. 시안은 계속해 생각을 이어 갔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가현의 앞에서 어떻게 그런 의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까,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저택을 지탱할 수 있었을까. 이제 시안은 깨달았다. 잠을 포함한 반나절이었다. 정점을 거닐던 시안의 행복이 불행의 낭떠러지로 전락한 것은. 시안은 커튼 사이로 넣어 놓은 손가락을 빼냈다.
“방에서 나가자.”
시안은 빛을 따라 걸음을 내렸다. 창문과 마주하고 있는 방문으로 절묘하게 빛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시안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2층 복도의 큰 등은 모두 꺼져 있었다. 시안은 가현의 방을 조용히 지나쳤다. 다른 하녀들의 방은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시안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 샹들리에가 보이는 난간에 몸을 기댔다.
“아무도 없네.”
시안은 아래로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시안은 계단 쪽으로 발길을 이끌었다. 난간에 가린 풍경이 시안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의 마지막 칸을 남겨 놓은 시안은 발을 내리기 전, 얇게 뜬 눈으로 장소 한 곳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빈 저택을 걸어 보는 건 남현과의 접선 날을 제외하면 처음이었기에 시안은 더욱 경직되어 있었다. 시안은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1층은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1층 역시 2층만큼이나 조용했다. 계단에서 내려온 시안의 걸음이 빨라졌다. 시안은 곧장 부엌을 향했다. 식탁 위에 누군가 쓰고서 치우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유리잔 하나가 있었다. 시안은 망설임 없이 그를 집어 들었다. 시안은 잔에 물을 가득 채워 단숨에 들이켰다.
“숨 막혀.”
시안은 빈 유리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식은땀이 눈 옆으로 흘러내렸다.
“아니지, 집은 달라진 게 없어. 달라진 건 나뿐이야.”
그리고 시안은 사용한 잔을 물에 헹궈 거치대의 빈자리에 집어넣었다. 부엌에서 등을 돌리려는 그때, 물건 하나가 시안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광이 없는 은 숟가락. 남현을 보고 떨어뜨린 그것이었다. 시안은 그날 제대로 보지 못하였지만, 직감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 시안은 수저의 머리 부분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넣어, 마치 담배를 끼듯 통에 담긴 수저를 위로 들어 올렸다.
“네 녀석이구나, 어제의 나를 난처하게 만든 게.”
그리고 시안은 수저를 쥔 손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잘 버티네. 그래도 얼마 가지 못할 거야. 넌 내가 반드시 구부러뜨릴 거거든.”
시안은 뒷주머니에 수저를 꽂아 넣었다.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1층의 몇몇 곳을 간단한 눈대중으로만 돌아본 뒤, 발길을 거뒀다. 목적이 아니었다. 시안의 목적은 갈증, 저택의 경치, 다른 그 어떠한 것에도 스며 있지 않았다. 오로지 한 가지였다.
‘지하 0층.’
시안은 살금살금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다른 하녀들의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지만, 시안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얇게 뜬 시안의 눈이 다시금 집 안 곳곳을 짚어 나갔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시안은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문이 열리고, 시안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시안은 주머니 안쪽으로 손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안으로 들어간 손은 기다란 물건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남현의 것과 똑같은 생김새를 가진 만년필이었다. 시안은 남현에게 들었던 말을 입으로 곱씹으며 손을 움직였다.
“뚜껑을 열고…”
“이거를 꽂아서…”
‘찰칵.’
버튼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시안의 입에서도 소리가 났다.
“아.”
시안은 침착히 그 앞에 쭈그려, 그곳의 구조와 느껴졌던 감촉들을 차근차근 머릿속에 입력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던 시안은 숨은 비밀 한 가지를 알아챘다. 아래 칸이 열리는 때면, 엘리베이터 내의 CCTV가 녹화를 끊는다는 것. 시안은 손에 든 덮개를 조심히 바닥에 내렸다. 그리고 양어깨를 높이 올려 크게 심호흡했다.
“가자.”
시안은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시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문이 열리고, 시안은 정면을 응시했다. 언제나 따뜻하고, 언제나 밝은 장소. 시안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걸음을 내밟았다. 거기서 시안은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현의 명령이기도 했다. 시안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에 시안의 눈길을 붙드는 수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시안은 그들을 뒤로 미뤘다. 이내 분홍색의 막이 시안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인의 나지막한 숨소리도 함께였다. 요동치는 심장의 소리가 시안의 귀를 뒤덮었다. 시안은 속으로 속삭였다.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난 나쁜 일을 하는 게 아니야.’
시안은 막을 걷었다. 부인의 숨소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손톱에 칠해진 매니큐어도, 베개 위에 얹혀 있는 귀걸이도, 콧잔등에 걸쳐 있는 안경의 위치도. 시안은 경솔하게 굴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만 이리저리 바라볼 뿐, 그녀의 어느 것 하나 손으로 건들지 않았다. 시안은 인큐베이터에 누워 새근거리는 아기를 보는 것만큼이나 조심스럽게 부인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시안은 한마디 말을 시작으로 부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는 고아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