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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Oct 05. 2024

왕의 침실

내 이름은 엘렌. 나는 항상 꿈을 꾼다. 잠을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구분 없이. 언제나. 꿈과 현실을 분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시티라고 불린다. 나는 A구역, 왕의 침실에서 방금 일어났다. 쉽게 말해, 나는 통치자의 아들이다. 나는 모르는 게 많다. 엘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의해 나의 이름은 알게 되었지만, 나머지는 알지 못한다. 가령, 어머니의 부재와 나이 같은 것들 말이다. 구역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축복받은 인간이라며 추앙한다. 간혹 집에서도 그를 묻는 사람들이 있다.


‘꿈을 꾸면 어떤 느낌이에요?’


‘꿈속에선 정말 뭐든 할 수 있어요?’


등등.


내가 아버지에게 물었을 때, 아버지는 내게 답하셨다. 꿈은 고귀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꿈을 꾸는 인간은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공감하지 못했다. 꿈이 없는 시간을 겪어 보지 못했으니까. 어떤 날엔 파자마를 입은 홀몸으로 주치의를 만나러 갔었다. 그는 나이가 많고, 머리가 벗겨졌으며, 늘 읽을 수 없는 글씨를 종이에 끄적이는 사람이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가 나를 보고는 말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편찮다. 어려운 말이었다. 그래도 나는 대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자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나에게로 달려와, 내 몸 구석구석을 손으로 눌렀다. 웃음이 튀어나왔지만, 그는 그따위가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머리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때, 나는 입을 떼었다.


“꿈을 꾸고 싶지 않아요.”


내 말을 들은 그는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가 그리 놀라운 거지. 난 그저 현실에 머물고 싶을 뿐인데.


“그럴 순 없습니다.”


“왜요?”


“신의 축복을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축복?”


“선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이런 선물을 바란 적이 없어요. 항상 몽롱하고, 제가 있는 곳이 현실인지 아닌지 헷갈려요. 이게 선물이라면 신에게 돌려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그에게 물었다.


“지금 저는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아니요. 이곳은 현실 세계입니다. 꿈이 아니에요.”


“그런 말을 꿈에서도 들어 봤어요.”


“꿈이 아니라는 말을요?”


“네.”


그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꿈을 꿔 보지 못한 사람이니, 제아무리 머리가 좋다고 한들, 나를 공감할 리 없다.


“최근에 친구가 생겼어요.”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어디에 사는 누구입니까?”


“꿈속 사람이에요. 녀석은 키가 크고, 늘 양복을 입고 있어요. 또, 항상 지팡이를 지니고 있는데, 다리가 아픈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어요.”


“꿈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군요…”


이거 봐, 내 말을 조금도 알아듣질 못하고 있어.


“녀석을 처음 만난 건, 한 달 전쯤의 밤이에요. 어디론가 저를 데려가려고 했어요. 그곳이 어딘진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더럽고, 지저분한 장소라는 건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어요.”


“녀석을 따라갔나요?”


“아니요. 우선은 꿈과 현실을 분간하려 애썼어요. 녀석에게 이름을 대라고 했고, 직위는 무엇이며, 어떻게 내 방에 들어왔는지를 물었어요.”


“그러고는요?”


“녀석은 이름이 없다고 했어요. 그래도 무언가 부를 호칭이 필요하다면 가이드라 부르라고 하더군요.”


“가이드라면, 어떤?”


“저도 모르겠어요.”


내가 답하자, 주치의는 차트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무얼 적으시는 건가요?”


“엘렌 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제 말을 기록하는 이유가 있나요?”


“물론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 순간, 그다음으로의 목소리, 표정, 몸짓, 그 모두를 기록합니다.”


“왜요?”


“그게 제 일이니까요.”


“아버지께서 명하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왜 그런 부탁을 선생님께 드린 걸까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주치의는 사라지고, 눈앞으로 안개가 찾아왔다. 당혹스럽다. 이런 꿈은 처음이다. 보통은 순서가 있다. 극심한 어지러움, 몇 번의 눈깜빡임, 현실 세계의 뒤틀림. 이번엔 셋 모두 건너뛰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머지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내가 와 본 적이 없는 곳이다. 이상한 냄새가 난다. 시큼하고도 구역질이 나는.


“어서 와.”


녀석이다.


“또 네가 날 불러낸 거야?”


“아니. 날 부른 건 너야.”


“난 널 부른 적 없어.”


“꿈으로 도망쳐 왔잖아. 내 도움이 필요한 거 아니었어?”


그리고 녀석은 나를 줄곧 보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의사를 너무 신뢰하지 마. 개중엔 돌팔이도 있으니까.”


“돌팔이가 뭔데?”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


내 주치의는 돌팔이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데?”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음. 우선은 말이야, 나와 같이 여행을 떠나 보는 건 어때?”


“난 여행을 떠날 몸이 되지 못해. 철창에 갇혀 있는 새와 같아.”


녀석은 지팡이를 손으로 휘리릭 돌렸다. 반짝이는 것들이 요란스럽게 공중을 뛰어다니더니 자욱한 안개에 얹혀 사라졌다.


“내가 안내해 줄게.”


녀석이 말했다.


“난 너를 알지 못해.”


“차차 알게 될 거야.”


“너는 좋은 사람이야?”


“너에게만큼은.”


“나를 위해 뭘 해 줄 수 있는데?”


“자유를 줄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러나 이미 꿈은 사라지고 없었다. 돌팔이가 내 피를 뽑고 있다. 주삿바늘을 언제 넣은 거지. 아무런 통증도 없었는데.


“금방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까운 피가 담긴 통이 보인다. 나는 괜스레 빈정대고 싶어졌다.


“그 피로 제 꿈을 멈출 수 있나요?”


“아니요. 이건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검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아무런 이상 반응도 나오지 않을 테지요.”


“그럼, 왜 피를 뽑은 거죠?”


내 말에 주치의는 놀란 듯 몸을 뒤로 물렸다.


“고…, 고개를 끄덕이시기에…”


쓸모없는 것. 나는 인사도 없이 그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이제는 아침을 먹어야 한다. 벌써 복도에는 먹음직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끝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파르제내가 아는 셰프 중 가장 젊은 친구이다. 그녀는 열 살에 궁으로 들어왔고,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최연소 셰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백여 가지의 음식이 놓인다 한들, 그녀의 음식 하나에 맥을 추리지 못한다. 파르제의 요리에는 다른 사람들의 요리에선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을 이르는 단어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언젠가 그 단어를 배우게 되는 날에는 나는 파르제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 단어를 말해 주고 싶다.


“엘렌 님!”


파르제가 양손으로 든 접시에서 한 손을 떼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저 무거운 걸 들면서 손을 뗄 수 있는 걸까.


“안녕, 파르제.”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나는 차마 돌팔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었다.


“응. 의사를 보고 왔어.”


그 말에 파르제는 줄에서 벗어나 나에게로 왔다.


“왜요?”


파르제의 눈은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너무도 아름답다. 저런 눈은 어떤 마음가짐을 유지해야 나오는 것일까.


“꿈을 꿨거든.”


“또, 그 키다리가 나오는 꿈이에요?”


“응. 사실 방금도 꿨어.”


“왜 그렇게 엘렌 님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일까요.”


파르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글쎄 말이야. 이젠 자기가 나의 가이드가 되어 줄 거래.”


“가이드요?”


그리고 파르제는 접시를 뒷사람에게 건네며 내 곁에 머물렀다.


“나에게 자유를 줄 거라고도 했어.”


“그놈이 우리 엘렌 님을 뭐로 보고. 그런 간사한 혀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왕권을 누리셔야죠. 모두가 부러워할 인생이라고요!”


나는 물었다.


“왕이 되면 사람들이 나를 부러워하는 거야?”


파르제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그에 나는 말했다.


“남이 부러워하는 인생이 뭐가 좋은 건지 모르겠어. 너는 어때? 너도 남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고 있잖아.”


“저는 즐거워요. 간혹 저를 미워하는 사람이 눈에 띄긴 하지만, 그래도 이 우월한 미각을 주신 신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크답니다.”


그때야 나는 파르제가 신을 믿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은 항상 예외의 대상이 된다. 어느 영역이건 신은 명예롭고, 신은 고귀하다. 하지만 나는 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혹은 그녀는 너무도 제멋대로이고, 너무도 이기적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나를 꿈속 세계에서 발버둥 치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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