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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Oct 12. 2024

병가

눈을 뜨니 또다시 아침이었다. 파르제는 사라지고 없었다. 이건 꿈일까, 꿈이 아닐까. 나는 우선, 주변에 있는 중요한 물건부터 훑었다. 시계, 창문, 어항 속 물고기.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치는 나의 눈, 코, 입. 모든 게 완벽하다. 무엇보다 손의 감각이 뚜렷했다. 하지만 이건 언제나 확률의 싸움이다. 나는 이불을 걷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가 담배를 태우기 시작한 것은 꿈속에서 풀피리를 만든 이후부터이다. 나는 배운 적도 없는 풀피리를 현란하게 연주했었다. 새들이 몰려들었고, 나무들이 신기해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은 병에 걸린 듯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아름다운 몸에 불씨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는 당장에 연주를 멈췄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모두가 불길에 휩싸였다. 그때의 내가 7살이니 담배를 시작한 지 벌써 1년이 넘은 셈이다. 나는 침대 밑으로 몸을 숙여 재를 털었다. 이곳에 재를 털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청소기는 그저 청소를 마쳤다고 말할 뿐이니. 냄새는 어쩔 수 없다. 향수로 감추는 수밖에. 나는 화장실로 가, 변기에 꽁초를 버렸다. 얼마 안 있으면 가정부가 문을 두드릴 시간이니 나는 서둘러 향수를 뿌려야 한다. 내가 그녀였더라면 진작에 거래를 제안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를 미끼 삼아 걸고넘어졌어도, 가정부의 인생을 청산하고, 새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너무 순진하거나, 너무 멍청한 여자인 게 분명하다. 땀을 수건으로 닦고, 주섬주섬 잠옷을 벗어 던진 뒤, 벨트와 넥타이까지를 죄고 나니,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가요, 라고 말한 뒤에 향수를 두 번 뿌렸다. 문을 열기 전,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엘렌 님! 잘 주무셨어요?”


그녀다. 코받침이 없는 수제 안경에, 건강한 몸이 드러나는 딱 붙는 의상. 웃을 때 보이는 덧니가 조금은 깨지만, 어디로 보나 그녀는 괜찮은 사람이다.


“응.”


그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매번 그렇듯이 그를 모르는 체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그녀의 입에서 직접 말을 듣고 싶을 뿐이다.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밖으로 나가려는 시늉을 보이면 그녀는 여지없이 입을 연다.


“오늘은 무슨 꿈을 꾸셨어요?”


나는 거짓 없이 대답했다.


“오늘은 몸이 묶이는 꿈을 꿨어.”


“몸이 묶여요? 누구한테요?”


“아무에게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꿈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꿈을 꾸는 날에는 꼭 식은땀이 나더라고. 오늘은 이불을 세탁해야 할 거야.”


그녀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안 좋으신 게 아닐까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어. 매일 모든 검사를 받고 있으니까.”


그녀는 아…, 하며 허공을 응시하다가 무언가 떠오른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오늘은 알약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건 어떠세요?”


알약. 알약은 꽤 괜찮은 식사다. 식사 대용이 아닌 제대로 된 식사. 그러나 알약은 많은 감각을 무뎌지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 특히나 후각과 미각이 제때 기능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알약은 총 여섯 종류로, 기호와 체내 수치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다. 여섯 알을 한 번에 먹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별거 없다. 살이 찔 뿐이다.


“오늘은 파르제가 자리를 비웠나 봐?”


“네, 병가를 썼어요.”


“어디가 아픈데?”


“감기에 걸린 모양이에요.”


“회복실에 있어?”


“네.”


“안내 좀 해 줘.”


가정부가 미소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찾더라고요.”


“나를?”


그녀는 따라오라는 손짓으로 나를 방 밖으로 이끌었다. 나는 곧장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왼쪽 풍경을 좋아한다. 꽉 막힌 오른쪽과는 달리, 넓게 트여, 모든 게 보인다. 한번은 꿈에서 저 유리를 뚫고 아래로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잠에서 깨기는커녕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나는 내가 실제로 죽은 줄 알았다. 아무튼. 아래를 보고 있으면 여러 생각이 든다. 나와는 계급이 다른 사람들. 깨나 열심히 버티고 있는 사람들.


“아! 1시간 17분 남았네요.”


가정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한테는 파르제가 깨고 나면 식사에 참석하겠다고 전해.”


“그럴게요. 그럼, 저 먼저 가 볼까요?”


“응.”


“혼자 가실 수…”


“나, 애 아니야.”


가정부는 네, 하고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회복실로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5라고 적힌 숫자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나는 숫자 5를 되뇌며 기분 좋게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엔 숫자 3이 떠 있었다. 3층은 들러 본 적이 없어, 무엇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듣기로는 가더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곳이라고 알고 있다. 내가 조금 더 나이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저들은 우리를 위한 존재란다. 꿈과 두려움이 없고, 죽음을 무서워하지도 않지. 단지, 시티의 존립 하나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야. 네가 지금보다 크면 저들이 얼마나 쓸모 있는 것들인지 알게 될 거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오고 가는 이들이 내게 인사를 건넬 때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뜬다. 여기까지 오는 길만 해도 스무 번의 인사를 받은 것 같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있을 때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나는 순간 어깨를 들썩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속으로 속삭였다.


‘가더다.’


특히 나는 다섯 명의 가더 중에서 가운데에 서 있는 검은 복장의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일동 차렷!”


그를 본 남자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소리쳤다. 그리고 양옆의 흰색 옷을 입은 가더 네 명이 발소리를 맞추어 내게 경례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들의 모습을 똑같이 흉내 냈다.


“하하, 엘렌 님. 이리로 들어오시죠.”


남자가 가운데 자리를 열어 주며 말했다.


“네.”


남자는 말이 많았다.


“엘렌 님도 키가 많이 크셨군요.”


“벌써 제 무릎을 뛰어넘으셨으니, 며칠 뒤면 제 허리까지 도달하겠습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뇨. 엘렌 님은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십니다. 경례를 표하는 건 저희가 할 일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어 숫자 5를 눌렀다.


“회복실에 가시는 모양이군요?”


“네, 파르제가 감기에 걸려서요.”


“파르제?”


남자가 되물었다.


“네, 셰프 이름이에요.”


“아아, 아! 그 파르제 말씀이군요! 최연소로 선정되었다는…”


남자가 말을 끝마치기 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를 힐끔 보니, 파르제에 관해 할 말이 남았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문이 닫힐 때까지 나를 향한 경례를 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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