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옆으로 높이 치켜진 총 사이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낙엽의 색을 닮은 그의 길고도 곱슬한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얼굴엔 흉터 하나 없었으며, 주름이라고 해 봐야 이마에 층층이 쌓인 세 가닥이 전부였다. 피부는 흰색의 바위가 노을에 비친 듯한 연주황에 가까웠고, 눈매는 비단 같은 아름다움과 사자와 같은 매서움을 동시에 품고 있었는데, 파도처럼 웅장한 옷이 그를 가려 주었다. 하지만, 그 누군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랴. 왕의 행차에 그 누가 아름다움을 눈으로 좇으며 감탄만을 토해 내랴. 아무도 그럴 수 없다. 패기가 온 하늘을 뒤덮었으며, 구름을 떠받들고 사는 이라면 그의 범위 아래 예외를 두지 못한다. 그런고로, 제아무리 왕에게 충직한 시민이라며 스스로 넋두리를 놓아 봤자, 남녀를 불문하고 로한을 향해 꽃 한 송이를 던질 수 없다. 로한이 한 걸음을 내딛자, 검은 복장의 가더를 기준으로 양옆으로 선 넷의 가더가 그의 그림자가 되어 뒤따랐다. 이를 두고 순방이라고 표현한다. 순방은 2주에 한 번. 오랜 전통이다. 순방이 시작될 때면 시민들은 준비를 한다. 단순히 표정뿐만이 아니라, 몸짓까지. 섬세한 작업들이다. 로한이 두 번째 걸음을 내딛자, 가더들이 크게 소리쳤다.
“왕의 행차시다! 모두 길을 비켜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에도 시민들은 발을 굴렸다. 그리고 로한은 백마에 올라탄 역사 속의 인물처럼 걸음에 무게를 실었다. 어디서든 숭배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미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가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로한은 따스한 사람이 아니다. 검은 복장을 한 가더가 어미를 눈으로 흘겼다. 그는 같잖은 바람잡이일 뿐일 테지, 괜히 위협을 조성하고, 그로부터 지위에 대한 집착, 혹은 우쭐함을 내세우고 싶다든가, 하는. 언젠가는 그도 깨닫지 않을까. 자신도 A구역의 시민에 불과하다는 것을.
“폐하, 오늘의 순방은 어떠신지요.”
검은 복장의 가더가 말했다.
“나쁘지 않네.”
“그러십니까.”
“…단지 오늘은 뭔가 꽃을 보고 싶은 날이군. 궁에 있는 것 말고, 자연에 피어난 아름다운 생화를 말이야. 특히 백합과 안개꽃, 그 두 개가 아른거려. 정원이 있지만, 정원은 자연이 아니지.”
“제가 세스 님에게 말을 전달해 놓겠습니다.”
“됐네. 녀석은 바빠. 그리고 애당초 낭만과는 거리가 멀지. 온종일 실험실에만 박혀 있는 놈한테 꽃이라…, 그런 꽃은 받고 싶지 않아.”
“다음 순방엔 구역의 사람들에게 꽃을 준비해 놓으라 지시해 놓겠습니다.”
로한은 호탕한 웃음소리 뒤로 씁쓸한 미소를 남겼다. 아마도 가더 놈은 로한의 단순한 웃음소리 하나만을 이해하고선 시민들에게 명령을 내릴 것이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사람.
왕의 순방은 해 질 녘까지 이어졌다. 다시 말해, A구역 시민들은 종일토록 로한을 기다리며 거리에 서 있었다는 게 된다. 가혹하게 들리는가. 글쎄. 진정으로 가혹한 사람들은 따로 있다. 하위 구역 사람들. 그들은 이런 안정과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F구역 사람들은 엘렌과 마찬가지로 꿈을 꾼다고 한다. 이는 물론 A구역 사람들도 아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누가 왕의 자식을 폄하할 수 있겠는가. 진화하지 못한 인간이라고.
순방을 마치고 로한과 가더는 헬기를 타고 궁으로 돌아왔다. 궁의 사람들은 얌전하다. 인사도 그렇고, 모든 행동에 우아함이 깃들어 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물러가도 좋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검은 복장의 가더 옆에 서 있던 흰색 가더 한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로한이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경례의 시간이 왔을 때, 그는 문이 닫히는 찰나 잽싸게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네 명의 가더가 총을 꺼내어 그를 겨눴지만, 로한은 손을 들어 괜찮다고 표시했다. 문이 닫히고, 흰색 복장의 가더는 잽싸게 왕의 침실인 18층을 손으로 눌렀다. 로한은 고요한 눈으로써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가더는 황급히 몸을 뒤돌려 로한을 향해 고개를 읊조렸다.
“죄송합니다, 폐하.”
로한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의 흔들림 없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인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결례를 범했습니다.”
“흠. 우선은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으로 하지.”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가 18층에 도착했다. 반투명에 가까운 검은 유리가 세 사람 정도 나란히 설 수 있는 현관 뒤로 널찍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한를 확인하는 붉은빛과 함께 문이 열렸다. 가더는 입을 벌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들어오게.”
로한은 말했다.
“예, 폐하.”
근미래적인 인테리어에 라탄과 같은 고풍스러움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었다. 전체적으로 미니멀리즘에 가까웠고, 딱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큼지막한 의자였다. 로한은 의자에 앉아 양팔을 팔걸이에 얹은 뒤, 모스 부호를 두드리듯 손가락으로 팔걸이의 끝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구슬처럼 생긴 홀로그램이 은은한 푸른빛을 내며 로한의 손을 감쌌다.
“나와 저녁을 같이 할 텐가?”
로한은 가더에게 물었다. 가더는 감히 그럴 순 없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지만, 로한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로한은 손을 감싼 홀로그램을 부드럽게 두드렸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가더를 바라봤다.
“코드네임이 뭔가?”
가더가 대답했다.
“예, A1130입니다.”
“1130이라…, 곧 있으면 자네도 검은 복장을 입게 되겠군.”
가더는 양손을 모았다.
“앞으로는 오늘처럼 눈치 보지 말게. 직급이 어떻든 상관없이, 무릇 사람이라면 자네처럼 긍지가 있어야 해. 용기가 필요한 일이겠지. 자네 상관도 오늘 일을 기억할 거야. 그릇이 작은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도록 해. 난 자네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네. 오늘 같은 경우도 이유가 있었을 테지.”
“예, 그렇습니다.”
“흠.”
로한은 홀로그램에서 손을 뺐다.
“우선은 석찬을 즐기도록 할까. 파르제가 복귀했다더군.”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거기 서 있는 곳에서 두 발짝만 뒤로 물러나 주겠나.”
가더는 로한의 지시대로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의자에 앉은 로한이 말했다.
“올리도록 해.”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서 빛이 나타났다. 빛은 정확히 로한과 가더를 기준으로 타원을 그렸고, 머지않아 세 번의 반짝임을 가져가더니 아래쪽으로 움푹 빠지듯 내려갔다. 가더는 푹 꺼진 바닥을 내려다봤다. 아래로는 분주한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말 그대로 음식을 반대로 놓고 있었다. 컵과 접시가 바닥 밑면에 붙으며 챙챙 소리를 냈다. 5분이 지났을까. 맛있는 냄새가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냄새는 정신이 나갈 만큼 아찔하고도 고혹적이었는데, 특히나 육즙을 한껏 머금어 있는 듯한 고기의 냄새가 가장 진했다. 그때, 로한은 가더를 향해 말했다.
“머리를 뒤로 빼는 게 좋을 거야.”
“예?”
로한은 일부러 말을 아끼는 듯 보였다. 몸으로 배우는 편이 빠르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서서히 뒤집히던 바닥은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가더의 콧잔등을 때렸다. 촛대가 범인이었다. 그리고 다시 빛이 타원을 그리며 바닥의 자국을 말끔히 지웠다. 가더는 어안이 벙벙한 듯 턱을 벌려 로한을 바라봤다. 로한은 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사실은 자네가 자빠지기를 바랐네. 아쉽게 됐군.”
그 말에 가더는 물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요?”
로한은 의자에서 일어나 말했다.
“중력이야. 중력을 조절할 수 있으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케 할 수 있지.”
“그보다는…”
가더는 채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신발로 바닥을 문질렀다.
“아아. 자네가 궁금한 건 이게 아니었군. 그래, 어떤가. 아무런 티도 나지 않는 게 꼭 회복실에서 쓰는 물건 같지 않나.”
“그렇다는 말씀은 수술용 레이저를 바닥에 부착하셨단 뜻인지요?”
“똑똑한걸.”
“정말이지 대단한 발상입니다. 크기 조절도 가능한 건가요?”
“물론.”
로한은 신발 굽으로 바닥을 쿵쿵 내리찧었다. 그러자 이제는 식탁의 양 끝으로 유리 의자가 솟아올랐다. 학습 능력이 빨랐던 가더는 불빛이 일자 이미 자리를 피해 있었다.
“…하, 하하! 하하하!!”
그리고 그는 말을 덧붙였다.
“이런 호사를 다 누려 보다니 영광입니다, 폐하.”
로한은 대답했다.
“그에 걸맞은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