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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영강 Aug 15. 2024

지킴이, 민트

‘탁탁.’

민트는 마을에 땅거미가 지는 게 보이자, 집 앞 각진 바위에 다리를 올려 발을 풀기 시작했다. 마을 누굴 데려와 붙여도 그 사람을 상대로 한 뼘 정도는 가뿐히 상회하는 다리 길이와 군살 하나 없이 부분 마디마디마다 곧 터질 풍선 같은 근육으로 가득한 장신의 미인. 빠지는 것이라곤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검은 머리 한 올이 없다는 점이었는데, 그마저도 남자들은 백색의 말과 같아 보인다며 뺨을 붉히며 그녀를 추앙했다. 다만 한 가지, 그녀는 그런 자신을 너무도 잘 알았다. 쉽게 말해, 밥맛이 없었다.


“오늘은 저기까지.”


민트가 눈썹 위에 손날을 붙여 누르고는 멀리 있는 불꽃을 응시하며 말했다. 목소리도 탁월했다. 발음이 어눌한 데서 만들어지는 경박함이 조금도 없었고, 미성인 남자의 목소리에서 살짝만 더 여성스러움이 가미되어 있었다. 듣기도 좋고, 말을 섞고픈 목소리였다. 대회가 있었다. 과거에는. 그러니까, 민트가 태어나고 이후 몇 해까지의 이야기다. 민트는 또래의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집착적으로 달리는 행위에 매료되었다. 어느 매체건, 사람이든, 사람이 아니든, 민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무엇이, 무언가가, 열과 성을 다하여 순간에 자신이 가진 모두를 토해 내는 그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민트가 열두 살이 되던 해, 그녀가 인생 처음으로 대회에 발탁되던 해, 모든 막이 반대로 내려갔다. 사람들은 더 이상 땀과 노력이란 존재에 손뼉을 쳐 주지 않았고, 열광해 주지 않았다. 감각이 변한 것이다. 땀은 흘릴 필요가 없는 것이고, 노력은 필수가 아닌 선택의 영역으로 전락했다. 세상의 고요한 돌풍은 민트에게도 찾아왔다. 민트는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람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 길로 시티를 버리고, 가족을 버렸다. 그리고 몸을 지켰다. 마을로 들어온 민트는 키와 마찬가지로 지킴이 자리를 석권한 이후, 단 한 차례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난 대회에서 처음으로 자리를 빼앗겼다. 민트는 축배는 물론이거니와, 승자와의 인사 자리에조차 나서지 않았기에 그 사람의 이름이 페리인 것을 제하고는 아는 사실이 없었다. 민트는 자리를 되찾고 싶었다. 어정쩡한 승리가 아닌, 압도적이고도 철저히 상대를 부서뜨리는 승리로써. 이제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불꽃의 위치를 확 인한 민트는 자세를 낮추어 양손을 바닥에 짚고 엉덩이를 높게 들어 올렸다. 그런 다음, 윗배와 가슴에 순차적으로 숨을 채워 넣었다. 탕- 민트는 일순간 터뜨리듯 단번에 그것을 뱉어냄과 동시에 있는 힘껏 땅을 찼다. 거울과 같이 선명하게 비치는 공간이 있었더라면 그녀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땅을 밟고 달리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야성미 넘치고, 맹렬한지를. 민트의 발 구르는 소리가 거리에 번지기 시작하자, 조용한 밤거리에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솟아났다. 여자의 얼굴도 간간이 보였지만, 대부분은 남자였다. 그들은 민트의 달리기를 하나의 스포츠를 보듯이 진중히 관람했고, 개중 심취한 누군가는 손을 모아 응원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민트는 항상 둥근 마을의 길을 시계의 역방향으로 내달렸기에 그 같은 감이 더욱 배가됐다. 불꽃의 절반, 딱 그 지점에 이르렀을 때 한참을 달리기만 하던 민트가 숨을 헐떡이며 달리기를 멈추었다. 어느 집 앞이었다.


“후우…, 후우…”


숨을 대여섯 번 골랐을까.


“아!”


민트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뺨 옆에는 팔을 번쩍 든 레드가 서 있었고, 그의 손에는 찻잎 색을 닮은 물 잔이 들려 있었다. 도착 바로 직전에 채운 듯 잔의 겉면에 차가운 물기가 몽글몽글 맺혀 있었다.


“영감. 매번 다 좋은데, 인기척은 좀 내고 나타나 주면 안 돼?”


민트는 오른뺨에 붙은 잔을 손으로 낚아채며 말했다. 민트는 레드를 이름 없이 불렀다. 원래도 예의를 차리진 않았지만, 그의 이름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내 몇 없는 낙인걸.”


잔을 건넨 레드는 대답과 동시에 팔을 내려 뒷짐을 졌다.


“낙으로 삼을 것도 없다.”

     

“너도 나이가 들어 보렴. 이 세상에 인간이 끼고 살 만한 게 별로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테니.”


그에 민트는 손사래 치며 레드를 향해 대꾸했다.


“어우, 설교는 됐네. 나도 시티에 있을 만큼 있었고, 거기서 별의별 경우 다 겪어 봤거든.”


“그럼, 내 말뜻을 더 잘 알 텐데?”


레드가 기울인 그 상태에서 턱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아이, 그렇다 쳐도. 내 성스러운 육상 행위와 영감의 급수대 놀이하고는 체급이 다르지.”


대꾸가 돌아오지 않았다. 말을 들은 레드의 발끝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감정이 상했거나, 지겨움을 느꼈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러한 레드를 보는 민트는 반대의 모습이었다. 미련투성이었고, 도도한 얼굴 위로 그렇다는 표를 너무도 크게 띄워 놓아 있었다. 레드가 문에 가까워졌다. 민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레드가 문에 손을 올렸다. 민트는 이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영감!!”


레드는 민트만큼이나 알게 모르게 콧대가 높았다. 일부러 끌어올려 나오는 모습이 아닌 걸 보아, 그의 무의식은 대단한 자존감으로 들어차 있는 것이 분명했다. 레드는 올린 손을 멈추지 않았다. 때문에 민트는 그를 다시금 불러야 했을 뿐만 아니라, 몸까지 데려가야 했다.


“아, 왜? 잘 것도 아니잖아.”


금세 레드의 곁으로 다가선 민트는 팔을 붙들며 잔뜩 빈정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레드는 딱히 표정에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의문을 건넬 때와 거의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졸음에 더욱 가까워진 거 같구나.”


“영감 잠 없는 거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야.”


민트는 코 꿰듯 휘감은 팔을 당겨 레드를 슬금슬금 길목으로 이끌었다. 여자에 끌려가는 깡마른 남자의 모습이 꼭 쓰레기 뭉텅이가 버려지기 위해 거리로 딸려 가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길이 좀 더 어둑해져 있었다.


“고칠 필요를 느낀 게지?”

     

길에 선 레드가 구름 안에 숨은 희미한 달을 쳐다보며 말했다.


“몰라.”


민트는 고개를 떨구며 대꾸했다.


“시간을 얕보지 말렴.”


“얕본 적 없어, 난. 어느 것도.”


민트는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빨 빠진 노인네를 실험용 삼은 것이 고약하긴 하다만, 기분이 좋으니 그냥 넘어가마. 앞으로도 오늘과 같은 마음가짐을 꺼뜨리지만 않으면 될 게다. 너에겐 그게 약이야.”


“영감이 만만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퍽이나.”


레드의 말을 들은 민트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불편한 얼굴을 서서히 띄워 올리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알아. 영감이 시티에 있을 때 뭐 하던 사람인지.”


“그래? 그거 기쁘구나. 너 같은 미인이 질척거릴 정도로 빼어난 사람이었다는 뜻이니.”


레드는 농담을 대하는 말투로 말했다.


“영감님, 신발 만들었었어.”


“그만. 거기까지 하렴. 과거를 기억 못 하는 사람에겐 그런 장난조차 상처가 되니까.”


민트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레드에게 둘러놓은 팔을 거둬들임과 동시에 몸을 그에게서 살짝 떼놓으며 말을 꺼낼 준비를 했다. 레드는 벌써 지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 아래로 드리운 그늘에 분노로 이어질 그림자가 맺혀 있었다.


“시티에 다녀왔어. 거래의 일종으로. 상대가 누군지는 말 못 해. 영감이 조용히 있어 줄 걸 아니까 지금 이렇게 전해 주는 거야.”


“……”


레드의 입이 삐걱거렸다. 적당히 메마른 입술이 붙었다 떨어질 때 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로도 레드에겐 사양한다는 몸짓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는데, 본능적 방어 기제인 걸로 보였다. 왜냐면, 굳은 몸뚱어리 위의 눈빛이 너무도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트는 거리의 좌우로 고개를 돌려 다른 귀가 없는지 살폈다. 갤러리를 청하던 사람들은 이제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동료가 있었나 봐. 과거의 영감한테. 처음엔 나도 잘못짚은 사람이겠거니 하고 무시하려 했는데, 아니었어. 어느 순간부터 경청하게 된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알겠더라. 그 사람이 진짜라는 걸. 영감을 실제로 한 번이라도 만나 보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을 것들을 우수수 쏟아 냈거든, 그 사람.”


말을 마친 민트는 레드의 표정을 살폈다. 떨리는 눈이 여전했다.


“영감, 나무 좋아하지? 마을로 들어오는 원목들에 은연중이라도 눈길이 가지 않았어? 그 사람 말로는 영감이 가죽 공예와 조각하는 일로부터 아이디어 얻기를 제일 즐기었다고 하더라고.”


“민트 양.”


거리가 느껴지는 이름 부르기였다. 그리고 레드는 얼굴을 들어 올려 민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게 왜 이러는 건가.”


“왜 이러냐니, 나는 단지 영감이 치욕을 씻을 수 있는…”


“나는 과거를 잊었어. 스스로 잊기를 택했거나, 나도 알지 못하는 계기가 있어 강제로 잊힌 걸지도 모르지. 둘 중 뭐가 됐든 레드란 이름을 부여받은 마을의 나는 시티에서의 나를 알고 싶지 않아. 운이 없었더라면 그로부터 나의 ‘진짜 이름’을 들었을 수도 있었을 테지. 하지만 민트 양. 부탁이니 아무 말도 하지 말게. 나는 어느 것 하나도 알고 싶지 않으니.”

원체 깊은 울림에 절절함까지 묻은 목소리는 보통 사람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보다 비굴한 공기를 자아냈다. 레드는 민트에게서 천천히 눈을 떼며 자신이 만든 그늘 속으로 몸뚱어리를 끄집고 들어갔다. 그 옆에 서 있는 민트는 겉으론 마냥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언제든 간격을 좁혀 레드를 붙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흐름이었다. 칠흑을 잘라 내어 엉성히 엮여 놓은 듯한 그늘은 의외로 빛을 들이지 않았고, 밝음과 거리가 먼 레드의 외관과 교묘히 어우러져 완벽한 어둠을 조성했다. 문이 닫혔고, 어둠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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