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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Nov 01. 2020

소년이 소녀에게 - 9

예고편이 없는 이야기


소녀-


그렇게 비밀을 공유한 우리는 종종 서로를 찾아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함께 읽어주겠다며 동네 도서관을 같이 가서는 그 애는 주구장창 내 옆에서 고개를 떨구고 때로는 작게 코를 골면서도 제 앞에 있는 책이 너무나 재밌었다고 뻔히 보이는 하얀 거짓말을 했다.


-그래? 어떤 내용이던데?
-어..? 되게 재밌는 내용....
-풋. 담엔 같이 안 와도 돼.
-아.. 아냐!! 내가 어제 늦게 자서 그래!!


병원 일정이 겹친 토요일 아침엔 축구공을 들고 온 그 애와 학교로 가서 같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바람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오후 주말 애들이 없는 운동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그 애 모습은 정말 우리 집 복실이 같다. 가끔씩 그 애의 머리칼이 그 애 눈앞을 가릴 때 나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했다면 이건 무슨 감정일까? 그럴 때면 집에 오는 길에 어쩐지 그 애 눈을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이것도 알약을 먹어야 하는 증상인가?


그 애가 내 앞에 나타나고 내 일상에도 조금씩 불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고 느꼈다. 어둠뿐이던 방안 굳게 닫힌 문 틈으로 한줄기 두 줄기. 이제는 학교에 가는 것이 더 이상 불안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범한, 다른 날과 다르지 않던 어느 날이었다. 불행은 평범하게 찾아왔다. 드라마에서처럼 복선도 예고편도 없었다.


 그저 똑같은 하루였다. 어디서는 애들이 목청이 터져라, 책상이 부서져라 탕탕탕 판치기를 하고, 어디서는 아이돌 얘기를 떠들고 어디서는 남자애들끼리 너 죽어라 나 죽어라 목조르기를 하고 있었다. 소란뿐인 그 시간 민정이가 찾아왔다. 수학 노트를 빌려달라고.


 노트를 꺼낸다는 게, 약통을 건드렸나 보다. 먹지는 않아도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녔던 약통이 데굴데굴 어디론가 굴러 떨어졌을 텐데. 목청 높여 떠들어대는 애들 틈에 알약이 약통 속을 뎅글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리가 없다. 그렇게 나는 노트를 들고 민정이에게 달려갔고, 내 마법의 알약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


되돌아온 교실의 공기는 5분 전의 그것과는 달랐다. 아이들의 눈빛이 슬금슬금 나를 향하고, 나를 보지 않는 아이들도 저들끼리 작게 수군거리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영문을 모르던 나는 자리로 돌아와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약통을 바라본다.


아, 그래서 다들 나를.


‘향정신성 의약품’
커다란 글자가 더 확대되어 보이는 건 왜일까. 얼른 약병을 들어 던지듯 가방에 쑤셔놓고 고개를 돌려 그 애를 찾았다.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인 걸 들키기 싫은 건 너 하나뿐이니까.


허공에서 부딪힌 두 눈. 그리고 그렇게 부스스한 머리칼을 내려 네 눈을 가리던 너.



더는 그곳에 있기가 싫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자기들끼리 하는 얘기가 귓바퀴에 다 흘러들어오는데, 고개를, 흔들리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하는 그 애가 보이는데.


가방을 들고 내달렸다. 책상인가 의자인가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오늘따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플라타너스의 끝에 교문이 한없이 작은 구심점으로 덩그렇다. 달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창문 끝에 걸려있을 네 시선이란 걸 알기에 빨리 벗어나고 싶다. 뜨거운 여름 아스팔트에 닿는 첫 물방울처럼 증발하고 싶다.



 신기하게도 내달리는 동안 하늘에선 내 눈물처럼 빗방울이 투둑 투둑 떨어졌다. 골목길을 지나는 내 어깨 위로 그렇게 소나기가 내려쳤다. 축축이 젖어드는 어깨에 떨어지는 것이 빗물인가, 내 눈물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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