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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그리고 비누

by 티스푼 Oct 04. 2024


차를 마시는 걸 좋아한다. 잘 우려낸 차를 한 잔 마실 때, 입 안 가득히 퍼져나가는 우아한 풍미와 은근한 정취가 즐거워서 종종 음미하곤 했다.

마시는 것뿐 아니라 마시고 싶은 차를 고르는 것도 남다른 재미가 있었다. 차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오랜 식견에 기반해 엄선하는 것이 아니라 왠지 시선이 머무르고 맛이 궁금해지는 차들을 손수 골라서 마셔보는, 그런 나만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그렇게 눈길이 가는 차들을 둘러보고 마실 때마다 많은 행복들이 있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첫만남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음을 거듭할수록 친밀하게 더해지는 기쁨도 있었고, 첫인상에 이끌려 새롭게 만나 찬찬히 안면을 익혀가는 두근거림도 있었다. 세상에 다양한 차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마음에 들어온 차들과 인연이 닿아 하나하나 마셔보고, 저마다의 고유한 맛과 향을 담뿍 느끼며 향유하는 것이 내게는 소소하지만 큰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그랬던 마음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시들해져갔다. 예전처럼 열띤 흥미와 관심이 사그라들고 점차 무료하고 권태롭게 느껴졌다. 아꼈던 차들도 한구석에 밀어둔 채 시간만 무상하게 흘러갔다. 차를 마시는 것도 마음이 썩 동하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하던 참이었다.

나는 평소에 차뿐 아니라 비누에도 관심이 있었다. 흔히 시중에서 판매하는 일반적인 합성 비누는 자주 씻다보면 쉽게 건조해져서 손과 피부가 하얗게 일어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피부가 따끔거리면서 땡기기도 하는 등등 여간 불편하고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 방법을 찾다가 가족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천연 비누였다.

천연 원료들을 사용해서 건강에 이로운 효능도 많고, 보습력도 일반 합성 비누보다 훨씬 좋아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특히 올여름은 폭염이라 금방 건조해지기 일쑤였는데 이때도 비누 덕을 톡톡히 봤다. 그래서 애정과 더불어 신뢰도 높아져서 더욱 애용하게 된 차였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차로 비누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차에서 비누로 형태를 바꾼다면 권태감을 넘어서서 좋아했던 마음이 앞으로도 더 길게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둘 다 내가 애정하던 것들이다.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더했으니 더욱 좋아하게 되지 않을까? 이제는 시들해졌지만 그전까지 충만했던 마음이 더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연장될 수 있으리라. 내가 좋아하는 비누라는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한 차를 경험하고 느끼면서, 겹겹이 더 애정을 쌓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더 길게, 더 오래, 더 많이 좋아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것을 더 오래 좋아할 수 있도록.
이 기대감이 내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이 에세이는 그런 희망에서 비롯된 기록들이다. 차를 비누로 만들면서 내가 경험했던 일상의 순간들을 써내려갈 이야기다. 좋아하던 마음이 끝나지 않고 연장되어가며 더욱 커져갈, 앞으로를 기대하게 만드는 현재진행형의 행복을 소소하게 담아보려 한다.

지난 8월 중순, 천연 비누를 만드는 S 공방에 가족을 통해 문의를 했다. 이미 알고 있던 공방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비누를 주문 제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늦은 시각에 문의를 드렸는데 감사하게도 바로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내가 소유한 차로 비누를 제작하는 게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차로 비누를 만들려니 조금 고민이 되었다. 시들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차를 좋아하는 마음도 한구석에 남아있었기에 그냥 차는 차로 마시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누로 만들면 원래의 향이 다 날아가버리지 않을지 걱정도 조금 들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최종적으로 비누를 만들어보자고 결정을 내렸다. 앞서 말했듯이 좋아하는 걸 더 오래 좋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마음이 많이 기울어졌다. 무료해진 마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앞으로도 계속 차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는 미래에 크게 이끌렸다. 그래서 처음 떠올렸던 생각대로 차를 비누로 만들자고 확실하게 결심하게 되었다.

며칠간의 고민을 매듭짓고 다시 S 공방에 문의를 했다. 이번에도 가족의 도움을 받아 문의했고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제작시 향이 다 날아가지 않을까 염려했던 부분도 전부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해서 안심이 되었다. 다른 궁금했던 점들도 상담하면서 더욱 마음이 확고해졌고, 즉시 제작을 주문했다.

비누가 완성되면 일주일 동안 건조한 뒤에 배송될 예정이며, 이쪽에서 2주 정도 더 건조하고 사용하면 된다고 했다. 앞으로의 일정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럼 첫 비누를 사용하게 될 날은 아마 추석 즈음이 될 것 같았다. 아직 비누가 완성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꼈던 차로 만들려는 만큼 어떤 비누가 만들어질지 너무 궁금하고 기대됐다. 사용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 같았다.

이렇게 그리 길지도 그리 짧지도 않을 한 달 가량의 작은 여정이 막 첫걸음을 내딛었다. 과연 어떻게 비누가 완성될지 기대로 벅찼다. 앞으로의 나날에서 느끼게 될 무수한 감흥과 맛보게 될 경험들 전부가 행복의 여정이리라. 이 모든 것을 기꺼운 마음으로 찬찬히 풀어보려 한다. 이 새로운 만남이 가져다줄 앞으로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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