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기록 (1)
(김영란법이 시행되기 전의 이야기임을 밝힙니다.)
수십 년 전, 5월 15일의 일이다.
중3 시절 처음으로 반장이란 걸 해봤던 나는, 당시 우리 반 부반장과 함께 스승의 날 이벤트를 준비했다. 사실 나보다 훨씬 야무지고 애들과의 관계가 좋았던 부반장 혜정이가 주도한 것이었지만.
무튼, 당시 담임쌤이 맡은 우리 반이 교사로서 마지막 담임이라는 말에 더 열과 성을 다해 준비했던 것 같다. 칠판 편지는 당연하고, 케이크, 풍선, 그리고 작은 선물까지. 그 모든 것을 교탁에 올려놓고 아침 조회에 들어오실 선생님을 기다리며 두근, 두근, 두근, 거렸던 마음이 기억난다.
반 분위기가 무척 좋고 단합이 잘 되었던 것 같다. 귀한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있던 아이가 있었는지 그날의 기억을 사진으로 찍어 주었다. 아이들이 써준 편지를 읽으며 행복해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아직도 앨범에 남아있다.
또한 수십 년 전의 일이다.
초6 시절, 우리 담임 선생님과 보낸 스승의 날이 기억이 난다. 전날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가서 선생님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선생님께 드릴 선물은 뭐가 좋을지 한참 고민을 하다 넥타이를 골랐던 엄마. 사실, 우리 담임 선생님은 정장은 거의 입지 않으셨는데.
다음 날, 교탁에 수북이 쌓인 선물과 그 걸 애들 앞에서 하나씩 열어 보며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기억난다. 우리 엄마가 열심히 고른 선물을 보고 나서 선생님이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이상하게도 기억력 좋은 내가 그것만큼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아이들 앞에서 선물을 하나씩 열어보던 그 상황이 무척 불편했던 것이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또다시 수십 년이 흘러, 이제는 내가 선생이 되었다.
신규교사로 임용되고 얼마지 않아 바로 그날, 스승의 날이 찾아왔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면 거짓말이다. 다른 반과 우리 반을 비교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 역시 거짓말이다. 신규교사로서 '학교'라는 곳에 가지고 있던 로망이란 게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다행히도(?) 우리 반 반장과 부반장은 그야말로 야무지고 똑 부러진 아이들. 자신들이 첫 제자라는 것을 알고 일찌감치 엄청난 준비를 해준 듯했다. 그날 아침 갑자기 상담을 하겠다며 찾아온 주현이(준비를 위해 시간을 끄는 역할인 듯하다.), 느지막이 교실로 가면 폭죽이 터지며 풍선으로 만들어 놓은 길, 그리고 손뼉 치며 환호하는 아이들, 케이크와 조촐한 선물, 편지. 마지막으로 칠판 가득 "사랑해요. 선생님!"
완벽한 스승의 날이었다. 그 옛날, 내가 우리 담임선생님께 해주었던 것과 같은. 아주 고맙고 감동적인 스승의 날 이벤트.
덕분에 나는 그날 퇴근 후 묵직한 종이가방을 들고 동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개중엔 선물 하나 받지 못한 선생님도 있었고, 중3 여학생 담임을 맡아 나보다도 더 화끈한 이벤트를 겪은 선생님도 있었다. 바보같이 서로 비교하면서
'음, 나 정도면 꽤 괜찮은 스승의 날을 보냈네.'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2학년 전체가 아이들을 인솔하여 현장체험학습을 가게 됐다. (사실 수학여행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침 일찍 학교 앞에 모여 아이들을 전세 버스에 태우고, 선생님들끼리 모여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왔다.
반장 세정이었다.
"선생님. 이거 엄마가 드리래요."
하며 건넨 것은 비에 젖을까 봐 염려하여 단단한 봉투에 담은 무언가(?)였다. 고마워,라고 말하며 당장 앞에서 열어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 옆 반 반장 수진이도 담임쌤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선생님..."
옆반 쌤이 돌아보자, 거기엔 엄청나게 큰 가방이 있었다. 어떻게 가져왔는지 모를 정도로 아주 큰.
옆반 쌤 역시, 고마워, 정말 고마워,라고 말하며 물건을 건네받았다.
모두가 궁금했지만 그 앞에서 확인하긴 어쩐지 꺼려진 그 순간,
버스 기사님이 탑승을 재촉했다.
"이제, 다들 가실까요?"
마음 한편에 설렘과 궁금함과 불안함을 안고 버스를 탔다.
부르릉-
우리 반 아이들은 벌써 신나 있었다.
빅뱅의 노래를 부르며, 시스타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라며 싸우기도 하면서 그렇게 왁자지껄한 버스는,
연기를 뿜어대며 출발했다.
(시간 부족으로 다음 이야기는 내일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