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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스런 Oct 18. 2019

'하루'라는 놀이터를 누비는 아이들

아이에게는 일상 모든 것이 놀이다.

  놀이가 일상인 아이에게 일상 모든 것이 놀이다. 아이들이 맞이하는 매일매일이 놀이의 시작이며 하루는 놀이터인 셈이다. 우리는 아이들처럼 새 하루를 바라볼 수 있을까? 흔하고 무덤덤해진 것들에 ‘일상’이라는 말을 붙이는 어른들과는 달리 아이들의 일상은 얼마나 다이나믹한가? 그들은 얼마나 값지고 상큼하게 순간순간을 느끼며 사는가? 얼마나 빈틈없이 충실히 열심히 하루를 살아내는가? 놀이로 점철된 하루하루가 아이들에게 삶의 훈장처럼 쌓여간다. 아이들은 엄마가 꺼내 입는 원피스 자락을 만지면서도 신기해한다. 아빠의 면도 거품을 보면서 까르르 웃는다. 씻으려 내놓은 쌀을 모래 놀이하듯 주물주물댄다. 아이들의 생글생글함은 일상 모든 것에서 놀이를 찾으려는 힘에 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일상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진한 눈매와 적극적인 개입을 이해해보기로 했다. 아이들과 눈앞의 것들을 교감하고 싶었다. 함께하는 모든 것을 일상놀이라고 불러보고 싶어 졌다. 일상놀이는 아이가 삶을 영위하며 만나는 궁금증, 그것의 해소를 돕는 물음, 조작, 그 모든 도전적인 활동을 아우른다. 아이는 급한 마음에 오줌을 싸버리고도 다리 사이에 흐르는 오줌을 바라본다. 발가락 아래 가득 모이는 자신의 오줌 위를 발바닥으로 팍팍 찍어보며 ‘이건 뭐지?’ 이내 신기함이 발동다. 과연 우리는 이런 것까지 아이의 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그래야 한다고 본다. 그냥, 아이가 노래하고 맛보고 물어보고 만지고 떼어보고 바라보는 모든 시도들은 그들에게 있어 놀이라는 것이 내 입장이다.


 인간의 특성을 규정하는 데 사용하는 여러 용어가 있다. 저자 개인이 만들어 낸 신조어까지를 포함하여 나열해본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만드는 인간),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 호모 커뮤니쿠스(소통하는 인간), 호모 쿵푸스(공부하는 인간), 호모 에로스(사랑하는 인간), 그리고 놀이하는 인간, 호모루덴스. 인간을 정의하는 데 ‘놀이’ 영역을 감히 포함시켰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생각 거리를 준다. 그렇다, 아이의 놀이를 막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 욕구를 틀어막는 것이다. 놀게 해야 맞고 함께 노는 것이 옳다. 경제적 여건이나 여러 상황상 마냥 아이와 노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어릴 적 몇 년 동안엔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아이를 낳고 몇 년 간은 큰 맘먹고 아이 곁에서 본능대로도 살아보자. 그렇게 신이 나게. “놀아요” “놀아요” 외치는 아이는 건강하다. 이것이 자신의 욕구를 알고 그에 맞게 살려는 아이의 자연스러운 몸부림이라는 것을 안다면 부모 인생의 긴 자락 중에 ‘아이와의 온전한 몇 년’을 떼어내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날의 하루다. 나는 이른 아침에 잠이 깼다. 아이들이 자는 틈을 타 얼른 커피숍에서 라떼 한 잔이나 사 올 요량으로 조용히 현관문을 여는데, 아뿔싸!.“엄마! 어디 가요?” 등 뒤에서 별안간 나를 불러 세우는 딸. 어찌 저렇게 귀도 밝누. ‘허허’ 웃음 반 아쉬움 반으로 ‘혼자만의 여유 있는 라떼 한 잔’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 조용히 아이에게 외투를 입히고 다시 현관문을 스르르 연다. 다행히 둘째는 자고 있다. “엄마! 혼자 커피 사 먹으러 가려고 했어요?” “어? 어...... 너희들이 자니까 조용히 얼른 다녀오려고 했지. 같이 가니까 이것도 좋네.” 가는 내내 종알종알, 그 녀석 입은 쉴 틈이 없다. 이참에 아침거리도 사보자 하여 마트에도 들렀다. 커다란 파 한 단, 우리 콩으로 키웠다는 콩나물 한 봉지, 정말 먹고 싶다고 애처롭게 바라보며 내 허락을 구해낸 콘프레이크 한 봉지......“엄마, 오랜만에 김밥 싸 먹을까요? 당근하고 파프리카를 보니 김밥 생각이 나네?” 하하하. 녀석은 밀당을 참 잘한다. 복작복작 엄마 혼을 쏙 빼놓다가 야무지게 아양을 떨었다가. 여하튼 아침 장을 가득 보고 집으로 들어서니 이제는 둘째가 깬다. 둘은 엄마의 장바구니가 마치 자신들의 놀이상자인 양 이것저것 꺼내보며 아침을 시작한다. 파를 꺼내 씻어보면 안 되느냐, 콘프레이크는 왜 아침 먹기 전에 먹으면 안 되냐, 왜 엄마는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간식을 못 먹냐 등등등 끝도 없이 나의 에너지를 나눠 쓴다. 아직 아침 10시도 안 됐는데 기운이 달린다.


  둘이 투닥대며 파를 만지다 파프리카도 색색이 나눠 갖더니 어느덧 부엌 멀찍이 돌아선다. 조금 노는가 싶더니 이제는 《싫어요, 병원 갈래요》 책을 찾아달란다. 오늘따라 너무 보고 싶다고. ‘하 참, 오늘따라 먹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는 왜 이렇게 많이 떠오르냐, 딸아!’ 나는 또 습관처럼 혼잣말을 꿍냥꿍냥 하면서도 어느새 책장 앞에 서 있다. 개수대에서 이제 막 채소를 씻고 달걀을 부칠 참이었는데, 그렇게 내 일은 중단된다. 무엇하나 제시간에 내 가늠대로 끝나진 적이 없다, 아이와 함께하면. 그렇게 책장 앞에 철퍼덕 앉아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음 달 이사도 가니 이 김에 아이 책도 찾아줄 겸, 분류해서 종류별로 묶어두기로 한다. 애초에 그 책 한 권을 찾으려 시작된 것이 책 정리가 되고, 이제는 묶어둔 책 묶음 위로 한 아이씩 자리 잡아 앉는다. 또 다른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여긴, 누나! 여긴 내 집이야, 민우 집,” “어, 그래. 그럼 이게 문이라고 하자.” 하며 떨어진 두 무더기의 책 위로 책 한 권을 가로로 누인다. 그 위에서 건너가는 놀이를 했다가 춤도 추고 책도 읽으며 한참을 논다. 슬그머니 틈을 보며 나는 개수대로 돌아온다. 수수숙 당근과 달걀을 볶아내고 파프리카와 씻은 김치를 쪽쪽 썬다. 서서 싸면 열 줄도 금방 쌀 김밥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 난 그저 순순히 아이 앞으로 요리 재료들을 끌고 간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내가 펴 놓은 밥 위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당근이며 우엉을 올려놓는다. 야굼야굼 김밥을 먹는 입과 서로의 입에 김밥을 넣어주는 녀석들의 보기 좋은 어울림이 날 미소 짓게 한다. 그렇게 아침은 11시가 되어서야 먹게 되었다. 뭐 거의 이런 식이다. 정해진대로 되기보다 이래저래 흘러가듯 하루가 채워진다. 김밥 꽁다리에 툭 튀어나온 우엉을 보니 촛불 생각이 났나 보다. 김밥은 어느새 케이크가 된다. 두 녀석은 번갈아 “후~”불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몇 줄 신나게 먹더니 이제는 슬근히 놀이방으로 간다. 첫째 녀석이 놀이 매트를 꺼내와 거실 바닥에 사부작 깐다. 놀이로 산 세월을 증명하듯 아이는 능숙하게 접시, 물그릇, 휴지 등의 준비물을 알아서 챙겨 온다. 그 옆에 앉은 둘째는 누나 노는 것을 살피더니 자기도 원했던 놀이인 양 몰입한다. 젖은 휴지를 뭉쳐 토끼와 곰 등을 만들고선 또 다른 놀잇감을 찾아 돌아선다. 자신의 작품이 빼곡히 꽂혀 있는 바인더를 꺼내 한 장 한 장에 눈길을 준다. “엄마, 이걸 내가 만들었다고? 참, 예쁘네.” “이건, 엄마한테 준 편지인데, 여기 있네?” 보면서도 재잘재잘, 네 옆에 엄마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누. 작품집을 보다가 그 곁에 있는 책을 꺼내 읽다가 그래도 엄마의 설거지는 계속되자 내 옆에 슬쩍이 다가온다. 나는 아이에게 뜨끈하게 금방 쪄낸 호박잎을 건네준다. 동생 곁으로 들고 가서는 좁디좁은 손바닥에 호박잎을 찢듯이 깔아 펴고 된장 쌈을 해 먹는다. ‘아이고, 이 귀여운 것들아..... 고된데 말도 못 하게 피곤하고 지치는데 너희들은  이토록 이쁘냐! 이쁜 것이냐!’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잘 먹고 놀고, 놀고, 또 놀고......


  집안일하는 사이사이마다 아이들 노는 모습을 휴대폰 사진으로 찍어둔다. ‘나중에 혹여나 우리 아가들 어릴 때 생각이 안 나면 어쩌나?’싶은 걱정에 간간이 숨어서 동영상도 찍는다. 허나 너무나 많은 것들 사이로 종횡무진 호기심을 옮겨가는 아이의 적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노는 모습이 마냥 이뻐 한 장씩만이라도 찍어두자 했던 당초의 내 계획을 포기했다. 아가들이 너무 이쁘게 어울리는 통에 나도 그냥 그들 곁으로 들어가 풀썩 앉았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같이 좀 놀자!’ 자동차 놀이, 종이접기, 노래 부르기, 춤추기를 하다 보니 밝았던 창 너머가 어느새 푸릇해진다.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밤이 찾아왔다. 그렇게 나의 하루도 아이와의 놀이도 정리된다. 이부자리를 펴고 누운 아가 둘이서 소근닥 댄다. “누나! 오늘 재미있었지, 그치?” “어, 민우야. 진짜 재밌었어. 얼른 자자, 내일 또 놀게.”


  나도 잔다.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를 이불속에 넣고 잔다. ‘오늘 하루도 옹골차게 차 흘렀구나!’ 꽉 찬 보름달 같 아이의 하루가 여문다. 놀이터에 들어서듯 오늘 아침 신나게 기상했던 아이들은 들뜬 마음으로 잠자리에 눕는다. 눈을 꼭 감고 장난치듯 잠을 청하는 아이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마음이 푸근하면서도 새큰하게 시리다. 아이는 한 치 더 자랐고 한 폭 더 마음이 컸을 테지. 큰 아이가 벌써 여섯 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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