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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가다

by 고운로 그 아이


25년을 함께한 너를 떠나 왔는데도

무덤덤한 나 자신이 낯설었다

짐을 들어낸 앙상한 빈 공간

너덜너덜해진 세월을 보고서도

무심할 수 있었다는 것이



겨울엔 뼈마디가 시렸고 여름엔 숨이 막혔다

그만큼 견뎠으면 됐

너에게도 최선의 선택이라고

네 등을 토닥여 주었다



조금은 숨이 찬 비탈길을 오르며 바라본

아주 먼 작은 불빛들

우리의 불빛도 숱한 날들 반짝였겠지

이제 새로운 날의 꿈을 다시 지피며

우린 더 행복해져야 한다



밤공기 선득하여 잠에서 깼다

어둠 가라앉은 거실에 나와

창문을 활짝 열 내다보았다

수많은 불빛 속에서

꺼진 불 하나 초연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작은 훌쩍임조차 새어 나오지 못하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지난 세월을 간직하기 위해

25년 추억 모두 짐짝에 구겨 넣어 왔다

너에게는 불빛 하나 남겨 주지 않은 채로



미안하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벽을 끌어안으며 했던 그 약속,

끝내 지키지 못할 약속만

네 가슴에 못박아 두고 떠나버려서







거의 2주 만에 새 글을 올렸습니다.

그동안 이사하고 짐 정리하고 낮에는 바쁘고 밤에는 곯아떨어지는 생활을 했습니다.

주로 밤에 글을 쓰는 저로서는 잠결에 끄적거린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25년간 살아 온 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서히, 조급하지 않게 적응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물도 정을 주면 인격체가 되는 것 같습니다. 헤어지기 싫어 울고 서로의 안녕을 빌었습니다.


머리와 마음의 적응 속도가 다른 듯합니다.

새 집은 난방이 잘 되니까 겨울 걱정은 없겠다 생각하면서도 계절을 예쁘게 담아내던 집 앞 정원이 그립기도 합니다. 겨울에는 나뭇가지들이 따스한 솜털 옷으로 갈아 입지요.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사는 생존 게임니다.


가스, 수도, 전기 등은 입주 후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사전에 철저히 점검해야 합니다. 누수되는 연결 부위 두 곳을 발견했습니다.


새로 들인 가구들의 냄새를 빼는 일은 거의 전쟁에 가까웠습니다. 25년 된 장롱, 20년 된 책상, 15년 된 가전제품, 소파 등을 처분하고 새 물건들을 들여놓아서 화학 물질로 인해 두통과 오심 증세가 왔습니다. 가루가 안 묻어날 때까지 닦아 내고 커피 찌꺼기, 녹차 찌꺼기, 숯, 탈취제, 선풍기, 공기청정기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인체에 무해한 집으로 정화시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집 방향이 동쪽으로 기운 동남향이어서 오전에 눈이 상당히 부셨습니다. 입주 전에 차단 지수 높은 블라인드를 설치하는 것은 필수항목이었습니다.

노트 한 권에 이사에 관한 내용이 빼곡합니다.


열흘 정도 지내면서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이 마음이 무얼까 했는데 그것은 아늑함이었습니다.

아기 때 이사 와서 아이들이 점점 크는 동안 집은 상대적으로 작아졌습니다. 좁아드는 만큼 더 포근히 감싸 안는 아늑함이 있었습니다. 외로움이나 공허함이 느껴질 빈틈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불만과 불편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몇 년 간만 머물 집을 구하면서 평수가 좀더 너른 집을 선택했습니다. 널찍널찍하고 서로 부대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아직도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과거는 아름답습니다. 돌아보면 온통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지 과거에 머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서있는 이 시점, 이 지점 위에서 새로이 출발해야 하겠지요.


고마웠어, 잘 살게. 너도 새 가족들과 행복해야 해.

빈 집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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