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츠 더스트(Bites the Dust)(7화)
‘집행일 D-4’. 어두운 얼굴로 버킷리스트를 넘겨보는 현승. 줄 그어진 항목보다 아직 남아있는 항목이 더 많다.
‘유명해져서 인터뷰 당해보기’
‘사랑하는 사람과 한강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 먹기’
‘부모님 스위스 여행 보내 드리기’
…
휴대폰 전화가 울려서 보면 ‘엄마’다. 현승의 기분을 알 리가 없는 현승 모의 목소리는 한껏 높았다.
“너 좋아하는 닭도리탕했는데, 먹구 갈래?”
현승의 본가. 현승과 현승 부가 밥상 앞에 앉아 데면데면하는 동안 현승 모가 먹음직스럽게 끓어오른 닭볶음탕을 냄비째로 들고 온다. 한 숟갈 떠먹는 현승. 현승 모는 아들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핀다.
“어때?”
“맛있어요.”
현승의 눈치를 살피던 현승 부가 현승 모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준비한 말을 하라는 듯이. 현승 모가 알았다는 듯 눈치를 주다 어렵게 입을 연다.
“현승아, 그… 이번 달…”
용건을 눈치챈 현승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돈봉투를 꺼내 건넨다. 현승이 퇴직금으로 받은 돈이다.
“이번 달 보너스 받았어요. 두 분 쓰세요.”
현승 부는 덥석 봉투를 받아 들고 액수부터 확인한다. 흥분한 듯 감탄사가 흘러나오고, 현승 모는 고마움과 미안함에 고개를 숙인다.
“매번 고맙다. 너도 필요할 텐데…”
그때 현승의 휴대폰이 울려서 보면, 세희의 전화다. 일순, 현승 모의 눈에 호기심이 스쳤다. 현승은 고개를 돌려 작게 받았다.
“여보세요.”
‘나 너 좋아한다! 어쩔래!’
당황한 현승이 휴대폰 소리를 다급하게 줄였다.
“네?”
‘내가 너 좋다고오!’
“전화 잘못 거신 거 같은데…?”
‘나. 현. 승!’
현승이 얼굴을 붉히며 전화를 툭 끊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현승 모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가 봐. 언능.”
눈치 없는 현승 부는 돈 봉투 속 지폐 개수를 다시 세기 바쁘고,
“누군데?”
현승 모가 현승 부의 옆구리 툭 찌른다. 현승을 재촉하는 현승 모.
“아가씨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구.”
난감한 현승은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늦은 밤, 술집 한쪽 구석에서 세희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 현승이 다가가 앞자리에 앉자, 얼굴이 밝아지는 세희. 발그레한 얼굴이 귀엽다.
“어! 현승 씨다!”
“많이 마셨어요?”
세희가 현승에게 소주를 한 잔 따라준다.
“자, 한 잔 받으시고~ 또 뺀찌 놓지 말구~”
“… 딱 한 잔 만입니다.”
“어떻게 5년을 같이 일하면서 술 한잔을 안 했냐아~”
씁쓸해진 현승.
“그러게요.”
“현승 씨, 여행 언제 간다 그랬져?”
“… 삼일 뒤요.”
“헥, 벌써요?”
“…”
“그럼 딱 세 번만 우리 만나 볼래여?”
“네??”
깜짝 놀란 현승. 그녀가 취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는데, 알딸딸한 목소리와는 달리 진지한 눈으로 말하는 세희.
“저두여. 집 없고 차 없고 학자금대출도 남았는데여, 현승 씬 좋아여.”
당황해서 얼굴 붉히는 현승.
“그게 무슨…”
“부담 줄 생각 1도 없고요, 딱 3일만 만나 보자고요~ 딸꾹!”
세희가 딸꾹질하는 모습마저 예뻐 보이는 현승.
“그래도 그건 좀…”
“그만 좀 튕겨라! 내가 확 차버리까 부다!”
세희가 술을 마시려 하자, 현승이 술잔을 뺏어 들고 마신다.
“하, 나도 모르겠다. 그래요 그럼.”
세희가 부끄러워하며 환호성을 지르고,
“대신 후회하지 마시고.”
“네네, 그럼요!”
해맑게 웃는 세희의 모습에 현승의 마음도 녹아버린다.
‘집행일 D-3’. 세희의 자취방 침대에서 눈을 뜬 현승. 옆에는 세희가 잠들어 있다. 현승은 상황이 복잡해져 골치가 아프다. 세희를 다시 보면, 새근새근 자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이불을 끌어올려 세희를 덮어주는 현승. 휴대폰으로 펀딩 페이지를 들어가 본다.
‘모금액 천만 원 달성?!’
현승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급격히 어두워지고.
보육원 사무실로 찾아간 현승. 보육원 원장과 선우도 함께 모여 앉았다. 현승이 선우의 후원금이 든 통장과 도장을 원장에게 건네자, 원장이 감격한 듯 받아 든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선우한테 잘 전달할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선우가 통장을 가리키며 묻는다.
“아저씨, 이거 뭐예요?”
현승이 답했다.
“선우한테 좋은 거.”
“선우한테 좋은 거면 아저씨도 좋아요?”
왠지 뭉클해진 현승.
“응… 우리 같이 좋은 거야.”
선우가 작은 손으로 현승의 검지를 꽉 쥐고 만세 하듯 흔든다.
“와, 우리 같은 편이다!”
현승은 잠시 놀랐다가 이내 웃음 짓는다.
소소한 후원금 전달식을 마치고, 현승이 보육원을 나서는데 중년 남자 한 명이 현승에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나현승 씨?”
현승이 경계하자, 남자는 기자 명함을 건네며 인사했다.
“중도일보에서 나왔습니다. 한길보육원 원장님한테서 전해 들었는데, 이번에 좋은 일 하셨다고요. 관련해서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인터뷰요…?”
“네. 저희 신문사에서 진행하는 ‘이달의 굿뉴스’ 코너에 나현승 씨 기부 펀딩 사연을 싣고 싶어서요. 괜찮으세요?”
현승은 당황했다. 인터뷰라니? 내가? 순간 버킷리스트가 떠올랐다.
‘유명해져서 인터뷰 당해보기’
잠시 후 한적한 카페로 자리를 옮긴 현승과 기자. 현승의 이야기를 듣던 기자가 상황 요약을 했다.
“그러니까, 박선우 군의 아버님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아버님이 사고로 돌아가시자, 선우 군을 위해 기부 펀딩을 결심하신 거군요.”
“펀딩을 만든 친구는 따로 있어요.”
“그게 누구죠?”
현승은 류영을 생각하며 머뭇거렸다. 류영은 정말 죽은 걸까.
“그게…”
“말씀하시기 곤란하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다고 현승 씨가 한 일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가요…”
“좋은 일 하신 겁니다. 요 근래 칙칙한 뉴스만 다루다가 이런 소식 들으니까 좋네요.”
현승은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집행일 D-2’. 현승은 세희의 자취방 침대에 누워 세희와 함께 인터뷰 기사를 찾아봤다. 세희는 자랑스럽다는 듯 큰 소리로 또박또박 기사 전문을 읽어 내려갔다.
“이 시대에 희망을 기부한 보통의 히어로 나현승 씨와 익명의 천사를 소개한다…”
감동한 세희가 현승을 꼭 껴안으면, 현승도 뭉클했다가 이내 심각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