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회고록 31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연대장이 새로 부임해 왔다. 장동순 대령, 육사 참모장으로 있다가 왔다(후에 박정희 정권 때 공화당 중앙의장과 국회의장을 역임(중장예편함)). 7월 중순 그해에는 웬 장마도 그렇게도 오래 끌었는지 매일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우리 무전반은 AM무전기(SCR-694)로 서울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 서울시민은 연일 계속 휴전결사반대 오직 북진통일만을 외치며 궐기하고 있다. 우리는 서울시민이 미웠다. 전선에서는 생사존망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데 그들이 미웠다. 당장에라도 좇아가 총을 갈기고 싶었다. 그들의 자식, 동생들이 전쟁터에서 무수히 죽어가고 있는데. 이대통령도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휴전협정동의에 승복하고 만 것이다. 이제 휴전이 임박했다. 휴전협정이 조인되면 24시간 내에 쌍방 간 현 위치에서 2km 후퇴, 4km 공간을 두고 비무장지대(완충지대 DMZ)를 설정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7월 27일 오전 10시를 기해 24시간 내에 전투가 정지된다. 우리는 환호성이 터졌다. 이젠 살았다. 그러나 전선에서는 마지막 24시간이 최후적 치열한 전투의 격전이다. 한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 그 24시간에 피아간에 많은 전사자를 냈다. 마지막 몇 분을 남겨놓고 전사한 대대장도 있었다.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했을까. 이것이 한국전쟁이다. 전쟁은 끝났다. 3년 1개월 2일 만에. 전쟁의 대가는 엄청났다. 미국을 비롯한 16개 지원국의 인적 물적 손실은 엄청났다.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포탄의 소모량은 2차 대전 때보다 더 많은 양이라는 것이다. 세계평화유지군(UN)이라는 정의의 기치아래 많은 젊은이들을 희생시킨 전쟁이었다. 한국은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버렸다. 특히 수도서울은 완전히 파괴 폐허가 되었다. 세계의 여론은 한국은 재기불능의 나라라고 했다. 특히 미국은 더 혹평을 했다. 서울의 거리에는 부상당한 불구자와 걸인 그리고 전쟁고아와 과부들. 누가 그들을 돌볼 것인가. 그리고 폐허가 된 이 도시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우리 사단은 그곳 사방거리에서 재정비하고 인제로 이동했다. 이곳도 전쟁의 피해가 많은 것 같다. 민가는 파괴되어 집터만이 드문드문 남아있었다. 집터에는 항아리를 깊이 묻어 식량과 옷 따위 나름대로의 귀중품을 감추어 놓았던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마당 모퉁이나 텃밭을 발로 구르면 퉁퉁 속이 비는 소리가 난다. 그곳을 파보면 항아리가 묻혀있다. 대개는 꺼내가고 빈항아리다. 그러나 어떠한 것은 미처 다 꺼내가지 못하고 곡식이 조금 남아있는 곳도 있었다. 수복이 됐지만 민간인은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다. 전에 부대가 주둔했었던 곳이라서인지 허름했지만 흙으로 지은 조그마하게 남아있어 수리해서 들어갔다. 부대 앞에는 한계령으로 가는 국도가 있고 소양강으로 흘러가는 작은 강이 있다. 동북쪽으로 설악산이 바라보인다. 그해(53년) 겨울은 그곳에서 지냈다. 군대는 공한기는 없다. 진지에 투입하지 않고 예비부대로 있는 기간은 교육이다. 계획표에 의한 교육이 반복된다. 교육장(산)에 가서 반별로 흩어져 교육을 한다. 교육이라기보다 야외에 나가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비전투기간이지만 실탄에 대해 통제를 하지 않았다. 눈이 쌓인 산골짝 등에 가서 꿩이나 멧돼지를 잡아와서 해먹기도 한다. 술은 특무대(지금의 보안부대)에서 약주를 만들어 파는 것이 있었다. 외상으로도 준다. 쥐꼬리만 한 봉급이지만 민가도 없고 부대매점도 없고 해서 쓸데가 없다. 술 사 먹는데 다 써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통신부대라 건전지를 여러 개 연결 고전압으로 만들어 강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와서 술안주를 해먹기도 한다. 가끔은 수류탄이나 총으로 잡아오기도 한다. 강원도는 눈이 많이 내린다. 기온도 영하 10도가 오르내린다. 강추위가 몰아치면 영하 20도가 오르내리기도 한다. 그해(53년) 겨울은 인제에서 지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통신대 선임하사관 이상사가 저녁때쯤 통신대원 전원을 막사 앞에 집합시켜 기합을 주었다. 겨울 눈이 내려 쌓여있고 얼음이 얼어있었다. 옷을 벗으라고 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상의를 벗었다. 팬티를 제외하고 다 벗으라는 것이다. 이상사가 우리에게는 무서운 존재였다. 거역하지 못하고 다 벗었다. 세찬바람이 살을 깎는 것 같다. 눈이 내려 얼어붙은 빙판이다.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포복을 하라는 것이다. 거역했다가는 더 무서운 벌이 내린다. 군대는 기합을 주면서까지도 선착순을 강요한다. 배를 빙판에 대고 기니 무릎이 까지고 팔꿈치가 벗겨진다. 서로 먼저 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늦게 긴 자는 그 앞에 조그맣게 웅덩이가 있고 물이 고여 살얼음이 얼어있다. 그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하랴. 얼음을 깨고 물속으로 점벙 뛰어 들어간다. 나는 다행히 그것만은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그해 겨울도 지나갔고 54년도 봄쯤 우리 대대는 고원통리로 이동했다. 거리상으로 약 12km 정도 될 것이다. 가서 보니 산비탈진곳을 깎아서 연병장을 만들어놓고 그 위쪽 산비탈진곳에 반영구적 막사를 지어야 했다. 지금 같으면 건축자재가 공급되고 연장도 보급해 주는데 아무것도 없다. 글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군대는 명령이다. 하라면 해야 한다. 제일 먼저 집을 지으려면 먼저 기둥을 세워야 한다. 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서있다. 그런데 저 나무를 어떻게 잘라야 하나 궁리 끝에 개인용 야전곡괭이 끝을 돌에다 갈고 찍으면 된다. 개인당 오전에 하나 오후에 하나씩 잘라오기로 했다. 숫돌대신에 강에 가서 납작한 돌을 주워다가 숫돌로 했다. 명령이라 용케도 맡은 책임을 다 했다. 기둥감으로는 나무를 켜야 한다. 제재기 대용으로 쓰리쿼터(군용 경차량) 뒷바퀴에 피대를 감아 제재톱을 사용해서 대용제재 기를 만들어 나무를 켰다. 이제 연장도 연구해서 만들어야 한다. 야전곡괭이로 손자귀를 만들고, 대패는 대검을 잘라 만들고, 끌도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만들었다. 모두가 자급자족이다. 닥치면 다 할 수 있는 것이 곧 인간인가 보다. 고대 미개인간들도 의식주 생활을 해왔는데 현대에 더군다나 불가능이 없는 군인이기에 할 수 있었다. 끌로 구멍을 뚫고 중방도 걸고 상량도 올렸다. 상량하는 날은 술과 안주도 차려놓고 집신에게 절도하고 지금 같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았겠지만 그 당시에는 몰랐고 해야만 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서까래도 올렸다. 전주의 보지선인 강철선을 잘라 못을 만들고 지붕은 싸리나무를 엮어서 덮고 그위에다 흙을 덮고 갈대를 베어다가 말려 이엉을 엮어 덮었다. 나폴레옹의 명언 불가능이 없다가 우리에게도 적용됐을까. 훌륭한 초가지붕이 됐다. 벽도 싸리를 엮어 흙을 바르고 마분지로 된 보급되는 휴지로 도배를 했다. 천정은 칡넝쿨을 사용해서 줄을 쳐 마분지를 발랐다. 구들은 산에서 납작한 돌을 구해다가 깔고 해서 아주 훌륭한 집이 됐다. 창문은 유리대신에 건전지를 포장하는 비닐지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