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하고 우스운 청춘이 아름다운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
- 제목: <푸르른 틈새>
- 저자: 권여선
- 장르: 장편소설
- 분량: 332쪽
- 독서 기간: 2024년 8월 20일 - 2025년 1월 7일 (5개월, 진도가 안 나가서 꽤 오래 걸렸다.)
- 별점: ⭐️⭐️⭐️
- 한 줄 평: 초라하고 우스운 청춘이 아름다운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
- 읽게 된 계기: 출판사 직원의 책 추천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어 이북으로 구매했다.
아래의 내용부터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 책 속 문장
어느 날엔가 나는 꽃무늬 커튼을 친 어두운 방에서 가구에 둘러싸인 채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움직일 수 있다고, 내부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믿음과는 달리 습기를 잔뜩 머금은 젖은 나무토막처럼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이렇게 서서히 젖어가고 싶다는 축축한 욕망이 혈관을 타고 번졌다. 먼 훗날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와 내겐 전혀 개의치 않고 이 방의 가구들과 함께 나를 들어내어서 어디론가 싣고 가 낱낱이 부수어주기를, 그렇게 해체된 채로 햇볕 받으며 말라가기를, 골수부터 관절까지, 마디마디까지 곰팡이로 뒤덮였던 몸이 콱콱 쪼개지고 틀어지며 버쩍버쩍 말라가기를 나는 꿈꾸었다. p. 216
우선 헤어지는 원인이 전쟁이라든가 천재지변 등과 같은 웅장한 타의가 아니라 사소한 자의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극적인 이별에 극적인 재회를 대응시키는 드라마적 연애 구조가 아니라, 사소한 힘들의 갈등과 침식작용으로 인해 관계의 회복이 전적으로 불가능해지는 현실적인 실연의 형태가 나타난다. 떠난 애인을 주저앉히려는 속절없는 노력은 세월이 흐르면 누구에게나 나타나는 자연적 기억상실의 증상이 유독 자기 환자에게만 나타났다고 여기고 그것을 기필코 인위적으로 치료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돌팔이의 광증을 닮았다. p. 327
나는 내일 이사를 떠난다. 지난 일주일의 시간처럼 내가 또 어떤 기다림의 간이역에서 다시금 내 삶을 향해 새로운 일별을 던질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이든 그때도 나는 이렇게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기억의 화살을 향해 내 가슴을 과녁으로 내보이리라. 이런 생각만으로도 몸속의 푸르른 창이 열리고 그 틈새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하다. p.395
- 줄거리
미옥은 자신이 태어난 날 파랑새가 마당을 세 바퀴 돌고 날아갔다는 신화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미옥은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하고 소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데... 죄의식과 실패로 가득 찬 미옥의 대학 생활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모두의 청춘과 그 의미에 닿게 된다.
- 느낀 점
젖은 방에 투영되는 미옥의 탄생과 새내기 시절을 다루는 초반부가 약간은 답답해서 중간에 한 번 덮었었는데, 비행기에서 다른 책을 너무 빨리 완독하는 바람에 유일하게 다운되어 있었던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어느덧 끝에 다다랐고, 엔딩이 참 좋았다. 해설을 보며 대학생 운동권으로서의 실패, 한영과의 연애 실패, 자살 실패라는 세 가지 실패가 보여주는 미옥의 청춘을 다시 돌아봤다. 특히 마지막 실패는 미옥을 살아있게 하기 때문에 실패가 아니라는 점에서. “청춘에게 실패란 기대와는 다르게 성숙하고 진지한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번번이 초라하고 우스워지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는 모르고 있었거나 부인해왔던 자신의 초라하고 우스운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계속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계속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찢겨서 열린 틈새를 통해 과거로부터 쏟아지는 빛을 계속 바라보는 것이다. 살아 있는 채로.” – 해설 중. 메시지 하나를 전달하기 위해 길고 복잡한 세계를 빚는 것이 문학의 매력이라면, 이 책은 방황하는 청춘이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