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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여행자 Aug 30. 2023

03. 내가 책 읽어 줄게

사람마다 걷는 방식과 속도가 다릅니다.


[내가 책 읽어 줄게]


아이가 책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아직 한글을 모르기에

혼자서 읽을 수는 없지만,

틈만 나면 동화책을 가져와 읽어 달라 합니다.

엄마 아빠로서는 즐겁고, 뿌듯한 일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습니다.

한 때 영상에 빠져 내심 걱정했었습니다.

유튜브 만화 영상에 심취해

끄려고 하면 언제나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아이는 이것만 보고를 외치고,

우리는 약속 지켜야지를 말했었습니다.

텔레비전이 꺼지던 소리와 함께

아이의 서러운 울음이 가득한

평일의 일상이었습니다.


극약처방으로 평일에는 텔레비전에

흰색의 커버를 씌웠습니다.

고장이 나서 나오지 않는다는 어리숙한 핑계에

아이는 다행스럽게도 속아주었습니다.

'이제 다 고치지 않았냐며'

텔레비전을 켜달라는 요청이

처음에는 있었지만,

우리의 의지로 꿋꿋이 지켜냈습니다.


아이의 놀잇감이 그렇게 책으로 옮겨졌습니다.

적당한 그림과 글이 섞인

동화책 몇 권을 선택해 일주일을 읽어줍니다.

아이는 지겹지도 않은가 봅니다.

골똘히 쳐다보며, 다 읽은 순간

"또 읽어주세요. 처음부터."라고 말합니다.

아이의 변화가 대견스러워 지루할 때까지

몇 번을 반복해 읽어줍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일까요?

아이의 변화는 즐겁지만,

같은 책을 수차례 읽어주다 보니

점차 힘겨워집니다.


"이제 그만 읽을까? 다른 책 읽자."

"안 해. 이거 또 읽어줘. 처음부터 읽어주세요."


결국, 아이의 고집에 못 이겨

그렇게 한 권의 책을 며칠 동안 반복해

읽어줬는지 모릅니다.


'왜 같은 책을 계속 읽는 걸까?'

'지루하지 않은가?'

'다른 책을 권유해 볼까?'


나름 혼자 만의 고민을 해보았지만,

아이의 마음을 쉽사리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책을 찾고, 읽는데 시간을 보내는

아이에게 고마워하고,

읽어달라는 책을 한없이 읽어 주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참의 반복을 하고 난 뒤였습니다.

그날은 회사일로 지쳐서 그런지,

몸과 마음이 모두 무거운 상태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런 날은 바로 샤워하고,

침대에 누워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김없이 아이는 책을 갖고 왔습니다.

어제도 읽었던 책입니다.

같은 책의 반복이라는 굴레가

더욱 무거운 피로로 느껴졌습니다.


"오늘은 다른 책이라도 읽어 볼까?"


"아니, 이 책 읽을래."


"그럼 아빠가 너무 졸려서 그런데,

혼자 읽어 볼래?"


"아, 아빠 피곤해? 코낸내 할 거야?"


"응, 잠시만 아빠 잘게. 그리고 읽어 줄게."


"그러면, 내가 읽어줄게. 아빠 잘 자."


아이의 허락을 받아내니,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습니다.

피로한 눈꺼풀을 감으려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는 또박또박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순간 피로가 사라졌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책을 읽는다고?'


이렇게 놀란 이유는

아이가 문장 속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정말 읽고 있는 거였습니다.

몸을 일으켜 세워 아이의 눈과 책의 글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아이의 말과 글은 거의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32개월에 불과한 아이는 한글을 모릅니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놀라웠습니다.

두 귀와 두 눈이 의심스러웠습니다.

아이에게 조심스레 물어봅니다.


"책 읽는 거야? 책 읽을 줄 알아?"

"나 다 알아. 잘하지?"

라며 뿌듯한 표정으로 웃어 보입니다.


아이는 글을 읽지 못합니다.

다만, 모든 내용을

머릿속으로 암기하고 있었습니다.

여태껏 왜 그렇게 반복해서

읽어 달라고 했는지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을 끝까지 읽어내고는 아이는 말합니다.


"아빠 잘 들었어? 내가 처음부터 또 읽어줄게."


참으로 헛헛한 웃음이 실실 배어 나왔습니다.

아이의 똘망한 눈과 발음을 해내려

애쓰는 입술을 바라보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책을 계속 읽어 달라고 했구나.'

'너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수 없이 듣고 있었구나.'

'글이 아니라 말의 소리로

네 기억에 자리 잡았구나.'


아이는 자신만의 방법과 속도로

책 한 권을 읽어 나가고 있었음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사람마다 걷는 방식과 속도는 다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자신만의 걸음과 속도로 삶을 살아갑니다. 성격이 급한 이는 보폭을 크고, 빠르게 걷기도 하고, 조금 느긋한 이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걷기도 합니다. 길은 어떠한가요? 환경에 따라 꼬불한 길, 똑바른 길 그리고 높낮이가 심하거나 평탄하거나 등 실로 다양한 길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여러 가지의 길이 만나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속도가 가진 경우의 수는 셀 수가 없이 많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나와 일치하는 세상 사는 방법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결국, 타인의 세상 사는 방식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고, 그들이 사는 방식이 잘 못 되었다 할 수도 어렵습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 하나씩 짚어 볼까 합니다.



1. 아이의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다.


 저는 아이의 습득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환경을 살펴보면, 글을 읽을 수 없으니 스스로 책 읽기란 불가능합니다. 한글을 읽을 수 없는 아이가 책을 읽는 방법은 그림을 보는 것입니다. 알록달록 생생하게 그려진 그림을 보며, 내용을 유추해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 보는 그림은 어떠한 내용도 떠올리지 못합니다. 아이의 상상력이 풍부하다고는 하나, 머릿속의 혼란과 부담감이 가중될 겁니다. 결국, 아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열심히 귀로 들어 자신의 것으로 익히는 겁니다. 내용을 어느 정도 익혀 놓으면, 그림을 따라 내용도 함께 머릿속에서 떠오릅니다. 그러나 한 번 듣는다고 그 내용을 기억할까요? 게다가 한 장 한 장 그림이 따로 있다 보니 대략적인 흐름만 알고, 책을 보기에는 아이에게 답답함으로 느껴졌나 봅니다. 우리가 읽듯 한 장의 그림과 글을 정확히 일치화하여 읽어내고 싶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수없이 반복하며 읽어 달라고 요청했고, 자신만의 속도로 책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림과 글이었던 책은 아이에게 그림과 말의 소리로 만들어졌습니다.

 


2. 아이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세월이 흘러가면, 아이는 다양한 경험을 할 겁니다. 모든 것이 처음 겪는 것이기에 지금의 책 읽기처럼 자신의 방법을 찾을 겁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경험으로 도전해 보고, 결과를 지켜볼 겁니다. 이전 경험의 노하우로 다행히 쉽게 헤쳐간다면, 큰 무리는 없습니다. 장애물이라 여겨질 것 없이 각 단계를 넘어갈 겁니다. 그러나 한 번씩 크나큰 장애물이 등장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이 통용이 되지 않을 때입니다. 몇 번은 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시도를 합니다. 노력의 정도를 달리하며 그 벽이 부서지는지 볼 겁니다. 하지만, 그때의 벽은 노력의 정도에 따라 부서지는 벽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도구와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아이는 그 벽 앞에서 한 참을 서성이며 헤맬 겁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통용되지 않는 극한의 벽 앞에서 좌절감과 무기력감을 느낄 겁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는 아이를 존중하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쉽게 하지 않는 것에 틀렸다 말하지 않고 인내의 시간을 함께 견뎌주는 겁니다. 우리 부모가 알고 있는 방법은 우리의 방식일 뿐입니다. 정답이 아닙니다. 그 외에 수많은 돌파 방식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새로운 생각으로 아이는 분명 그 벽을 넘어설 겁니다. 여러분도 그리고 저도 몰랐던 답을 아이는 찾아낼 겁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가장 힘든 것이 인내와 믿음을 가지는 겁니다. 내 아이이기에 '잘할 것이다'라는 믿음보다는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불안이 큽니다. '혹시나 시기를 놓치면 어떡할까'와 '제대로 된 답으로 아이를 인도하지 못하면 어떡할까'의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이 부분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아이의 부모이고, 책임자입니다. 험난한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갈 지혜와 지식 그리고 환경을 주어야 합니다. 그뿐만일까요? 경험해 보지 못한 수많은 상황이 걱정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을까 두렵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우리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곁에서 그 방법을 알려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우리의 방식도 정답이 아닙니다. 알려주지 못해 우리만큼 살지 못할까 걱정이 되지만, 반대로 말하면 우리라는 한계를 아이에게 덮어 씌우는 셈입니다.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지만, 딱 우리 부모만큼만 살게 됩니다.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가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는지를요.


 저는 제가 노력해 성장하고, 변화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이에게 강요하기에는 제가 가진 세상의 틀이 너무 한정적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이의 환경이자 미래가 저라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답답해졌습니다. 저만큼만 살기를 바라지 않고, 저보다 나은 인생을 살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아이가 가진 주위 환경을 우선 넓혀 주려 합니다. 세상 일 뜻대로 되지 않기에 아이가 나를 넘어설 수 없다 하더라도, 나만큼은 살게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인생이 커지면, 부모만큼만 살아도 큰 손해는 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 살아가는 방식은 모두 다르고,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멈추어 있는 자와 나아가는 자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나아가는 방식과 속도를 존중할 수 있도록 우리 부모들이 먼저 그 세상을 넓혀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넓어진 부모의 환경만큼 아이에게는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을 더 가져볼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오늘도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성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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