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살아가다가 나를 한 번쯤 기억해 줘, 안녕.
지난 화 | 18. 새벽 두 시, 나 홀로 경찰서에 가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어떤 이유로든 찾아오게 된다. 그 불행은 한 사람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갈 정도로 철저하게 아프기도 하다. 숨 쉬는 것도 버거운 삶은 차라리 숨을 끊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뇌는 판단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 속에서 나는 늘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고, 나를 살리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늘 물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2024년 겨울, 아주 추운 겨울을 살아낸 나에게 고맙다는 말과 봄이 찾아온 것에 안도감을 느끼며 마지막 이야기를 써 내려가려고 한다.
인공심장박동기를 제거 한 뒤로 컨디션이 회복되었을 때, 크리스마스 날 강릉에 가서 생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버스와 기차도 예매를 했고, 모아둔 수면제와 번개탄을 가지고 떠날 계획이었다.
그전에 마지막 정리를 해야 했다. 12월 14일은 내 단짝 친구의 생일이다. 친구의 생일을 맞아서 함께 부산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숙소를 예약했고, 계획을 세웠다. 차마 친구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이 여행이 우리의 마지막 추억이 될 거라고. 이 여행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겠지만, 훗날 나를 떠올렸을 때 ‘좋은 친구‘로 남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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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선생님께도 연락을 했다. 당시에 타국에 계셨는데, 지금껏 너무 고단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편안해지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선생님껜 크리스마스 때 마지막 순간을 보낼 거라고 얘기를 했다.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최대한 덤덤하게 얘기하려고 애썼다. 오래 전화를 하다가, 브런치에 내 이야기를 적어서 올려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주셨다.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해주고, 거기서 힘을 얻을지도 모른다고.
https://brunch.co.kr/@time-limit/31
그렇게 내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시한부 생을 택한 건 진심이었다. 나는 이 브런치 북의 연재를 끝낸 뒤에 크리스마스 날 세상을 떠날 거였으니까. 위로와 공감을 주고 싶다고 했는데, 사실 그 당시에는 나의 죽음에 근거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내가 이만큼 힘들었으니 충분히 편해질 권리가 있다는 합리화를 하고 싶었던 거다.
상담 선생님과의 관계도 정리를 해야 했다. 흉부외과 수술을 받기 위해서 입원을 하는 당일에 함께 정신과에 갔다가, 병원까지 데려다주셨다. 몸과 마음이 무너진 나에게 괜찮아질 거라고 얘기해 준 분이기도 하다.
수술을 받은 지 3일 정도가 지났을 때, 전화 통화를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이번연도까지만 살 거라고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시한부를 선고한 순간이랄까.
이젠, 솔직한 이야기를 꺼낼 준비가 된 것 같아서 하려고 해요. 저는 딱 이번연도까지만 살 거예요. 처음 입원했을 때, 저 빼고 모두 암환자 분들이 있었다고 말했었잖아요. 솔직히 그분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저도 시한부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냥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음독 시도 할 땐 간절히 바랐어요. 간이 망가져서 오래 못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근데 결국 위세척도 했고 지금 너무 멀쩡하게 살아있네요. 그래서 스스로 시한부 인생을 정했어요. 딱 한 달만 살아보자고요. 그냥 이건 제 삶에 대한 마지막 배려예요.
이 말을 들은 선생님은 내가 하는 말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진다고, 본인은 그 마음에만 집중할 거라고 하셨다. 나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정신과에 가서 독서토론을 함께한 의사를 다시 만났다. 나는 이제 딱히 두려울 게 없었다. 잘 지내는 척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에, 수술은 잘 끝났고 경찰서도 다녀왔고, 처음 겪는 일이 참 많았다고. 너무 거지 같은 인생이라고 답했다.
죽고 싶은 마음은 얼마나 드냐길래,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요.”라고 답했다. 오히려 살아있는 날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사람은 훨씬 솔직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의사는 내게 입원 권유를 했고,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답했다.
선생님도 저 포기해 주시면 안 돼요?
그가 애쓰는 모습이 너무 잘 느껴졌기 때문에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책을 빌려주는 것도, 삼일에 한 번씩 오라고 하는 것도,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도. 이 모든 게 너무 불편하고 싫었다.
당연히 답은 “안돼.”였다. 내가 꼭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너무 아깝다고 하셨다. 아직 너무 어리고 앞으로 80년도 더 살 텐데 아깝다고. 내가 대학도 가고,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고, 아이도 낳으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이 권리마저 내가 누리지 않을 건 없다는 말은 사실 별로 와닿지 않았다. 내겐 너무 먼 미래처럼 느껴졌으니까.
그 이후에 생각이 많아 보이셨고, 어렵다는 말을 했다. 나에게 살아갈만한 삶이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은데, 그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거 같다고 했다.
소화기 내과에 갔다. 교수님은 와줘서 고맙다고, 덕분에 힘이 난다고 하셨다. 약으로 위를 가득 채워온 나를 보고, 늘 내 편이 되어줄 테니 지칠 때마다 오라고 얘기한 담당 주치의다. 이분 덕분에 힘든 병원 생활에서 조금 숨통이 트였던 거 같다. 어떤 의사가 좋은 의사인지 늘 고민하던 나에게, 정답지 같은 그런 사람.
그러나.. 큰 고통을 감당하고 있던 나는, 와줘서 고맙다는 말에 제가 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할 생각을 못했다.
다짜고짜 정신과 약을 내밀면서 물었다.
이거 다 먹으면, 3일이라도 안 깨어날 수 있어요?
아직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3주도 넘게 남았는데, 마음이 부서질 듯이 아팠다. 브런치북 연재를 시작한 뒤로, 거의 매일 같이 구토를 했다. 엄마의 뇌진탕, 흑기사와 불륜, 아빠의 불륜. 이 모든 과정을 글로 나타내는 과정이 너무 괴로워서 매일 울었던 거 같다.
그래서 3일이라도 안 깨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냐고 물었다. 의사에게 의식을 잃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는 환자라니. 나도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다.
하지만, 교수님은 개똥 같은 질문에 정성을 다해 대답해 주셨다. 약정보를 검색해서 하나씩 일어날 부작용에 대해서 다 얘기를 해주셨다. 결론은, 이거 그냥 몸만 더 힘들어질 거 같은데? 덕분에 그날은 몸이 힘들어질 짓을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으로 유서를 썼다. 솔직히 유서라는 걸 어떻게 쓰는지는 모른다. 재산이나 이런 걸 써야 하나? 내게 가진 건 알바해서 번 30만 원이 전분데. 그럴듯한 유언이라도 남겨야 하나? 내 인생의 마지막 문장은 뭘로 해야 하지?
유서를 쓰는데만 2주가 걸렸다.
그리고 사진관 가서 사진을 찍었다.
왼쪽에 있는 교복 입고 찍은 사진 밖에 없길래, 깔끔하게 입고 증명사진을 찍었다. 인생 최고 몸무게를 달성해서 못생긴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작가님의 포토샵 기술로 봐줄 만한 정도의 얼굴이 됐다.
영정사진으로 교복 입은 모습을 올리고 싶진 않았다.
이때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 내가 진짜 곧 죽을 거라니.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테마로 인화된 사진을 넣어주셔서 더욱 이상했다. 그리고 이걸 붙잡고 정말 많이 울었다. 우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유서의 마지막 말은,
가끔 살아가다가 나를 한 번쯤 기억해 줘, 안녕.
으로 정했다.
너무 외로운 삶이었다. 아픈 삶이기도 했고. 그래서 한 번쯤은 나를 떠올리며 지내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죽음을 앞둔 지 2주가 조금 안 남았던 날, 나는 응급입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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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는 “정신병동 응급입원기”에서 이어집니다.)
친구의 생일 여행을 떠나려고 한 당일, 나는 정신병동에 응급입원이 됐고 27일간 정말 많은 걸 느끼고 퇴원을 했다. 그곳에서 만난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를 울게 만들었고, 살아보자는 마음을 들게 만들었다.
어릴 적 엄마가 집에서 투신자살을 한 뒤로 시설에서 자란 친구도 있었고, 소주랑 맥주를 마시고 혈관이 끊어질 정도로 손목을 그은 친구도 있었고, 성형 수술 부작용으로 괴로워하다가 번개탄을 피운 언니도 있었고, 할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해서 죽으려고 한 친구도 있었고, 학교폭력을 당해서 담배빵이 남은 친구도 있었고,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은 할머니도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불행의 형태가 참 다양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겪은 일이 생을 마감할 정도로 괴로운 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도 불행을 경험한 뒤로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알려준 건, 생존이었다.
마음이 부서질 듯이 아팠던, 아픈 그들이 나에게 살아가라고 얘기해 줬다. 본인이 더 힘들 텐데 많이 힘들었겠다며 위로를 해줬다. 브런치를 통해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은 따뜻한 마음을 느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고, 마침내 나는 살아갈 용기와 함께 사람을 살리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라고 물었던 그때의 나에게 나름의 정답을 알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삶의 의미를 그렇게 찾았는데,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나에겐 운이 정말 좋았고, 좋은 사람들이 곁에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인지하게 됐다. 이 사실만으로도 나는 살아갈 이유가 충분했다.
그리고 강릉에 가서 생을 마감하려고 했던 나는 퇴원 이후에 눈이 펑펑 내리던 날, 강릉에 가서 좋은 추억을 만들고 왔다. 번개탄과 수면제가 아닌, 달달한 디저트와 인생의 의미라는 책을 가지고 갔으며, 눈물이 아닌 웃음이 더 많았던 순간을 누렸다.
우리, 이제 조금 덜 아프게 지내자.
조금 더 용기 내서 살아가보자.
The end.
에필로그에선 그동안 연재를 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제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둠 속에서 싸워온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충분히 괜찮아질 수 있다는 걸 함께 증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