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한 답변보다는 여지를 남기자
2장 관계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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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은 하는 것도 어렵고, 당하는 것도 속상한 일이다. 하지만 일로 얽힌 사이에선 전자를 '잘'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거절을 당하는 건 속상한 내 마음만 추스르면 되지만, 거절을 하는 건 상대방의 상황과 앞으로의 관계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늘 'YES'만 하며 살 순 없는 노릇이니, 효과적으로 'NO'하는 방법을 익혀둘 필요가 있다. 거절도 제대로 해야 관계가 불편해지지 않는 법이니까.
거절은 꼭 필요한 기술이지만, 너무 어려운 기술이기도 합니다. 남의 의견이나 상황을 많이 신경 쓰는 저 같은 사람에겐 더더욱이나요.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거절을 당하거나 거절을 해야 하는 순간이 언제나 찾아옵니다. 전자는 사실 수월한 편이에요. 거절을 당하는 일이 좋을 리는 없지만, '그냥 이 일은 나와 인연이 아닌가 보다', '뭔가 나와 일하기 어려운 다른 사정이 있겠지', 정도로 정리하면, 그럭저럭 납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프리랜서 중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해하거나, '내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가?'라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건 바보 같은 짓입니다.
하지만 후자는 달라요. 거절을 하는 건 생각보다 섬세하고 까다로운 작업입니다. 여기엔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어요. 먼저 오래 거래해 온 클라이언트라면 제 상황을 솔직히 얘기하고 양해를 구하는 방법을 취합니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랑 일정이 딱 겹쳐서 어려울 것 같은데 어쩌죠?" 이런 식으로 '미안한데 이번에 함께 일하긴 어렵다'는 의견을 전달하는 거죠. 그러면 백이면 백, '괜찮다, 다음에 또 연락하겠다'라는 회신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다음에 다시 연락이 오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그 클라이언트의 일을 맡습니다. 한 번의 거절은 양해가 가능하지만, 두 번의 거절은 '아, 이 사람은 많이 바쁘구나. 연락해도 같이 일하긴 쉽지 않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으니까요.
친한 지인의 소개를 받아 처음 연락해 온 클라이언트를 거절하는 일은 이보다 더 어렵습니다. 저도 상대를 잘 모르지만, 상대 역시 저를 잘 모르니까요. 게다가 그 첫 인연이 거절로 이어진다면 좋은 기억을 남기긴 어렵습니다. 때문에 처음 연결된 클라이언트의 일은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원칙을 지키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더라고요. 올해 초 기존 클라이언트와 시간이 급박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새로운 클라이언트가 마찬가지로 급히 진행해야 하는 프로젝트를 청탁해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후자를 거절하는 일이 생겼거든요. 거절하면서도 너무 속상했던 터라, "정말 죄송해요. 제가 웬만해선 처음 일하는 클라이언트 일은 거절하지 않는데, 일정이 너무 딱 겹쳐서 둘 다 잘 해낼 자신이 없네요."라고 솔직하게 얘기했답니다. 뭐, 그 이후로 연락도 없고 일도 엮이지 않고 있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ㅠ.ㅠ
조금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아니라 상대에게 거절의 순간을 양보하는 겁니다. 얼마 전 친히 지내던 클라이언트가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소개해주었는데, 제가 많이 해보지 않았던 작업을 요청하시며 견적서를 보내달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견적서와 프로필 파일을 보내면서, 솔직하게 상황을 얘기했습니다. "제가 그 일을 많이 해봤던 건 아니고, 또 했던 것도 오래전 일이라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라고요. 물론 그 일이 만약 저에게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해 잘 해낼 겁니다.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요. 하지만 그쪽에서 정확한 팩트를 알고 저를 선택해야 함께 일할 때 삐걱거리는 일이 없을 거란 생각에 제 상황을 솔직하게 오픈했답니다. 결과적으론 아직 피드백이 없는 상태지만, 그건 그 일에 제가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겠죠. 다만 고민이 되는 건, 한 번 더 연락을 하는 게 나을지, 아닐지입니다. 보통은 이런 경우 상대가 곤란할까 봐 연락을 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처음 소개받은 클라이언트니 '나는 당신과 함께하게 될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라는 걸 어필해줘야 하나 싶어서요.
'거절'을 좋은 경험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나쁘지 않은 경험으로 만들려면,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를 잊어선 안 돼요. 특히 '죄송하지만'으로 시작하는 사과의 말과 솔직한 상황 전달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여기에 '다음번엔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라는 말까지 더해진다면 BEST겠죠.
거절의 기술은 '단호함'보다는 '부드러움'과 '유연함'에 답이 있습니다. 폐쇄적 태도보다 오픈 마인드가 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든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