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가지 끝자락, 꽃망울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다. 곧 완연한 봄이 올 것이다.
봄은 파스텔컬러가 지배하는 연한 계절이다. 요즘 여행 욕구가 상한선을 넘어서고 있어 최근에 서점에 들러 여행 에세이를 구입했는데 책에서 봄의 모습을 생생하게보여주고 있었다. 쇼핑몰 CEO인 주아현 작가의 '하루하루 교토'이다. 내용보다 여행 사진들 특유의 봄스러운 감성에 매력을 느꼈다. 4월의 교토 여행 일기가 담겨 있으며 사이사이에 교토의 봄을 담은 사진들이 실려 있다.
길 양쪽엔 벚꽃나무가 그득하고 분홍색 꽃잎들이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은 골목, 창문을 뚫고 나온 따스한 햇살이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조용한 카페 안 풍경, 잔디밭에 풀썩 앉아 피크닉을 하는 모습의 사진들. 사진만으로 봄의 설렘을 미리 느낄 수 있었다. 당분간은 이 계절의 포근함을 온몸으로 느끼기 힘드니 과거의 봄들을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들추어 봐야겠다. 봄은 가장 짧고 그래서 더욱 예쁜 계절이다.
벚꽃잎들이 짧은 생을 마치기 시작하면 기온이 급격히 오르기 시작한다. 간절기를 느긋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금세 여름이 찾아온다. 사실 나에겐 가장 두려운 계절이 여름이다. 추위보다 더위에 약한 사람으로서, 여름은 내가 가장 예민하고 화가 많은 시기다. 게다가 습함까지 더해지니 땀은 쉬이 마르지 않아 머리카락은 목덜미에 달라붙고 옷은 눅눅해진다. 이리도 밖을 나가기 무서운 계절이지만, 에어컨(이 녀석의 영향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사실이다)과 여름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들에 기나긴 무더위를 나름 무던히 지나간다.
가장 산뜻하고 생기 있는 풍경을 가진 계절이 바로 여름이다. 동물보단 식물에게 활기를 더해주는 싱그러운 계절. 식물들은 서로 내기라도 하듯, 밝디 밝은 연두색을 앞다투어 뽐내며 자신의 생동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 모습들이 내 눈엔 기특하고 어여쁘다. 또 하나의 매력은 바로 제철 과일. 좋아하는 수박, 복숭아, 자두가 여름에 모두 몰려 있다. 그리고 시골집에서의 여름을 추억하게 한다. 하늘에 달이 걸려 있을 때 슬금슬금 나가 옥상에 텐트나 돗자리를 깔고 누워 가족들과 도란도란 수다를 떨던 기억이 아른거린다.
가장 긴 계절을 지나오면 기분 좋은 쌀쌀함이 찾아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가을이다. 덥지도, 그렇다고 너무 춥지도 않은 적당히 시원한 날씨, 그리고 그 날씨 덕에 옷을 가장 스타일링하게 꾸밀 수 있는 시기, 높고 선명히 푸른 하늘,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로 인해 노랑과 빨강이 어우러진 자연의 모습, 내가 좋아하는 독서의 계절. 이렇게 나열해 보니 가을의 매력은 쉼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단풍잎들로 폭신하게 깔려 있는 길을 지르밟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산책하는 순간을 참 좋아한다. 그러다 코로 마음껏 숨을 들이쉬면 숲의 냄새가 시원하게 들어온다.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코가 뻥 뚫린다. 이렇듯방해보다 좋은 영향을 안겨주는 날씨로 풍요로운 사유에 잠길 수 있고 운 좋게 나무 벤치를 발견하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책도 꺼내 읽는다. 자연스레 글도 잘 써진다. 나에게 가을은 가장 성숙한 계절이다.
이제 바람 소리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올해의 막바지와 다음 해의 시작을 함께하는 춥고 시린 겨울이다. 이불속에서 가장 나오기 힘든 시기로 생활 반경이 급격히 줄어든다. 따뜻한 집에서 달달 새콤한 귤을 까먹는 것이 큰 행복으로 다가온다. 사람뿐 아니라 대부분의 생명체가 움츠러드는 겨울은 나뭇가지도 앙상함을 드러내지만 왠지 다들 결연한 느낌이 드는 계절이다.
함박눈이 내리면 창문에 눈결정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모두 보석같이 예쁘지만 모양이 제각각이라 괜히 하나하나 지세히 관찰하게 된다. 아침 일찍 나오면 간혹 밤새 소복이 쌓인 눈에 어떤 자국도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때 내가 뽀드득 소리를 내며 첫 발자국을 새기면 괜스레 부지런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그리고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가장 반가운 곳이 문을 열기 시작한다. 붕어빵 혹은 잉어빵, 그리고 호떡의 계절이 온 것이다. 사장님이 새하얀 봉투에 몇 개를 담아 주시면 소중히 가슴팍에 안아 들고 간다. 겨울은 추위만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사계절의 모습이다. 각 계절마다 고유한 특징들은 있겠지만 사람마다 그 계절에 담겨 있는 기억과 느낌이 분명 다를 것이다. 좋아하는 계절과 싫어하는 계절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더위로 힘들어하는 여름이 누군가에겐 맛있는 아이스크림과 팥빙수를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새파란 수영장과 바다에 뛰어들어 즐겁게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계절이다. 혹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을이 다른 이들에겐 외롭고 쓸쓸함을 안겨다 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계절의 사이인 딱 이맘때, 앙상한 나무와 분홍빛 꽃망울들로 둘러싸인 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간절기를 좋아할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계절과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계절.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때론 그 사이 어디쯤이든 우리만의 계절을 우리답게 잘 흘려보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