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호의를 받아본 기억이 적은 사람은
작은 호의에도 어쩔 줄 모르죠.
나를 보며 짓는 미소 하나
다정한 손짓 하나에
철옹성처럼 단단했던 마음의 벽은
아침햇살에 시나브로 사라지는
안개처럼 되어버려요.
어린 시절,
전 저한테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회색빛 과거를 끄집어내고
내면의 상처를 뒤집어 까발려서 보여주곤 했어요.
‘난 이런 암울한 과거가 있어, 괜찮아?’
‘난 이런 경험도 있다고. 감당할 수 있겠어?
난 이런 이야기도 하고 싶을 정도로
너와 친해지고 싶어.
나를 밀어낼 거면 미리 하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어떤 이는 가만히 들어주면서 공감해 주기도
어떤 이는 저한테 그런 이야기는
좀 나눠서 하라며 면박을 주기도 했어요.
어떤 이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어느새 연락이 끊기기도 했어요.
일명 저를 손절하는 거지요.
사실 제가 관계의 초반에
제 이야기를 꺼내게 된 계기가 있어요.
고등학교 시절 꽤 오래 가까워진 친구가 있어서
할머니와 살고, 부모님이 이혼한 이야기를 꺼냈어요.
그다음 날부터 그 친구가 저를 밀어내기 시작했요.
이동수업도 같이 안 가고,
등하교도 같이 했는데
학교 정문 앞엔 아무도 없었지요.
눈치 없던 저는 계속 그 애 주변에
다른 애가 없을 때를 기다렸고,
몇 달 뒤 다른 애한테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요.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들렸지요.
제가 가까워지는 게 부담스럽고 싫다고.
상대방에게 거부당한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그리 좋지 않아요.
그럼에도 지금은 그 사람의 ‘그 당시’ 그릇이
내 이야기를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러웠나 보다,
서로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지 하고, 수긍하지요.
또 한편으로는
제가 타인에게 너무 부담을 주지 않았나.
급작스럽게 행동하지 않았나 돌아봐요.
조금 더 관계가 원숙해졌을 때,
가랑비에 옷 젖듯이 하나하나
나를 알려주는 게 좋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은 아니에요.
부모의 이혼, 학창 시절 따돌림이나
제가 앓던 병에 관한 이야기,
가난 같은 건 제가 선택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사람들이 기피하는 거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그 기억도
‘하나의 사실로서 과거’로 넘기려고 해요.
마트에 과자를 사러 가면
다양한 과자들이 열과 오를
맞춰서 진열되어 있어요.
어린 시절엔 박스에 담긴 과자들은 너무 비쌌어요.
매대를 돌아 봉지 과자 쪽을 몇 바퀴 돌면서
주머니에 쥔 천 원으로 살 수 있는 걸 찾곤 했지요.
숨 가쁘게 뛰어와서 방구석에 앉아
두 손에 힘을 꽉 줘서 윗부분을 잡아 뜯거나
그것도 안되면 옆부분을 잡아 뜯으면
바삭바삭한 과자들이 제 시야를 가득 채웠어요.
손가락에는 과자 부스러기와 기름기가 잔뜩 묻고
때때로 입천장이 까슬까슬해져도
먹는 삼매경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어린 시절에는 두 봉지도 부족했는데
요즘에는 한 봉지도 다 못 먹고 남기기 일쑤예요.
그래서 대충 접어서 두고
나중에 생각이 나서 다시 꺼내보면요.
기름에 절여져 눅눅해지고
바삭한 맛은 온데간데없지요.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런 건가 싶어요.
한 번 내면의 이야기를
여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것 같아요.
비싼 박스 과자처럼 종이 포장 안에
한 번 더 비닐 포장이 있는 두 겹이면 좋을 텐데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봉지 과자 같아요.
한 번 뜯으면,
한 번 나를 오픈하면 다시 마음을 닫기란 어려워요.
그래서 저라는 사람이 눅눅해지지 않으려면
너무 나를 보여주기보단 중간중간에 동여 매고
나를 지키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요.
좋다고 다 주지 말고 말하지 말자고 되뇌면서요.
그러나
아직도 제게,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타인의 순수한 호의란
여름날 붕어빵 파는 곳을 찾으려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럼에도 한 가지 희망은
전 눅눅한 과자도 꽤 잘 먹는다는 사실이에요.
누군가가 제게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꺼내준다면 전 저와 깊은 사이가
되고 싶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럼 이 넓은 세상 어딘가
서로의 이야기를 다 듣고도
꽤 오랜 시간을 같이 공유하면서도
눅눅해지면 눅눅한 대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