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 일리아스>
신화를 좋아한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의 조각들을 전해 들을 때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바로 그 점을 사랑한다. 이런 막연한 동경심을 많이 해소한 준 시간이 있었다. 바로 대학교 시절 ‘그리스 로마 신화’ 교양 수업이었다. 마치 전공 수업이라도 되는 것처럼 예습과 복습은 물론 스스로 찾아가며 심화 학습을 했었다. 매 시간 들려주시는 교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알차게 맺힘을 느꼈다. 신들의 계보를 따로 외우려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졌다. 산을 좋아하지 않지만 나중에 유럽에 간다면 꼭 올림푸스 산에 올라 오래된 신들의 흔적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느 날처럼 한껏 기대를 품고 칠판에 가까운 앞자리에 앉았다. 신들이 잔뜩 등장하는 제대로 된 아주 오래된 책, 서사시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교수님의 흥미진진하고 착 달라붙는 이야기는 그 책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수업을 마치고 생전 가지 않던 도서관을 찾았다. 바로 그 책을 찾아 펼치고는 읽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처음 몇 장을 넘겨봤지만 이건 내가 아는 그런 책이 아니었다. 교수님이 전해주신 내용을 어디서도 찾기 어려웠다. 그렇게 이 책과의 첫 만남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 이후에도 가끔 이 책이 생각나면 종종 들여다보려 했으나 역시나 비슷한 이유로 그만두게 되었다. 고대 그 당시의 책은 모두 이런 식이 었어야 했는지 모르겠으나 나에겐 여전히 내가 아는 책이 아니었다. 한 없이 이어지는 등장인물의 자기소개에 질려버렸다. ‘내가 어디 출신의 누구의 아들이다.’ 이게 수없이 반복되었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대충 넘어가며 읽을 수도 있었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읽고 싶은 고집에 더욱 읽기가 어려웠다. 이름은 모두 알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이 없다는 ‘일리아스’였다.
여전히 ‘일리아스’에 대한 미련은 계속 내게 남아있었다. 주요 내용은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접했기에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고 직접 느끼고 싶은 욕망이 한쪽에 항상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지내다 우연히 이 책 <명화로 보는 일리아스>를 만났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날아갔다. 속이 다 시원해졌다.
조금 지겨울 수 있는 부분마다 삽화가 절묘하게 책의 흐름을 잡아주며 나아가게 해주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해보았을 테다. 이 책도 명화가 그런 역할을 하며 일리아스를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도와준다. 엮은 분들의 노력이 곳곳에 돋보인다. 나와 같이 읽고 싶지만 읽지 못한 자를 위한 배려로 탄생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 책을 덮고 나서 정말 개운했다. 원전, 원본을 읽어야 한다는 다소 쓸데없는 고집을 제대로 꺾어준 좋은 책이었다.
‘일리아스’에 대한 내용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접했을 것이기에 뻔한 스토리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점은 ‘신이나 인간이나 똑같다’였다. 초능력과 불사의 존재라는 것만 제외하면 둘 다 불완전했다. 사랑하고 싫어하고 편들고 미워하고 판박이였다. 실제로 이러한 신과 인간의 감정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고 또 그 전쟁이 끝나게 된다. 어쩌면 신화라는 이야기도 인간을 더 이해하기 위해 탄생한 게 아닌 가 싶다. 신이라는 존재에게도 인간이 가지는 고민과 갈등이 있음을 보여 주면서 우리 인생의 어려움이 당연한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말이다. 신을 빗대어 인간의 나약함과 불안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했던 게 신화가 아닐지.
살면서 지치고 힘들 때가 누구나 있다. 이를 위로해주고 도와주려는 책들도 아주 많다. 하지만 같은 인간 차원에서의 도움은 한계가 있다. 이런 막막한 상황에 속는 셈 치고 신화를 읽어보면 어떨까? 그 위대한 존재라는 신들도 우리와 똑같이 엉망진창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보면 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