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록Joon Jun 14. 2023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

<라틴어 수업>

어려서부터 배우면서 자란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것투성이다. 배우는 즐거움을 알아갈 때쯤 지겨워진다. 남들 아는 만큼 나도 아는 것 같아서 멈추게 된다.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에 배우려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배우지 않으니 자라지 못한다.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이 내일과 같다. 눈과 귀를 닫고 살아간다. 부족한 게 없다는 생각에 나와 다른 것을 차단한다. 오로지 나만 맞기에 불편한 것을 귀찮아한다. 그렇게 듣지 않고 보지 않는 자신만의 세계가 전부인 양 지낸다. 안락하고 편안하다. 이 순간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확고하다.


이런 상태로 주변을 살피면 우스운 모습이 보인다. 남들을 가르치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이 그것이다.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는 것처럼 다른 이를 유혹한다. 이것만 알면 삶이 달라지고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외친다. 설마 이걸 믿는 사람이 있겠냐는 웃음이 무색하게도 주목하는 이가 넘친다. 분명히 딱 봐도 이건 아니다 싶은데도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들이 경험한 것과 깨우친 것을 폄하하지 않는다. 각자의 깨달음은 가치가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싫은 부분은 그것이 전부이며 언제나 옳다는 태도다. 그들은 자기 외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나의 작은 개인으로 돌아가기를 꺼린다. 마치 그러면 모여든 사람들이 바로 떠날까 봐 벌벌 떠는 모양새다. 내 것만이 최고이며 불변의 진리임을 설파하는 그들이 애처롭다. 초롱아귀의 등불에 몰려드는 것처럼 달려드는 이들은 더욱 안타깝다.


흔하게 벌어지는 이런 코미디와 서커스를 보면 점점 더 심해진다. 배움을 배척하는 꽉 막힌 내 태도가 옳다는 심지가 굳어진다. 문득 나만 옳다는 생각이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며 깨닫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나는 최소한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니 낫다며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며 안도한다. 세상을 낫게 하지 못할 거면 망치지는 말자는 생각에 일조했다며 뿌듯해한다.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단단한 나도 가끔 마음이 풀릴 때가 있다. 진짜를 만나면 달라진다. 자신의 이야기는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을 인정하는 이에게는 한없이 마음이 열린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할 수 있다. 자기가 경험한 일과 생각이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가짜다. 이를 인정하고 시작하는 사람은 진짜다. 그런 사람을 만났다. 이 책의 저자가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 안에는 따뜻한 열림이 꾸준히 들어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상황과 이룸을 뽐내거나 추천하지 않는다. 내가 겪은 일은 이랬고 그땐 이렇게 느꼈다고 설명하고 묘사한다. 받아들이는 것은 읽는 이의 몫인 듯 이렇다 저렇다 강요가 없다. 글자 하나하나에 다른 이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람의 온도가 서려 있다. 활자가 봄의 기운처럼 마주할 때마다 나를 데워주는 기분이다. 이렇게 들려주는 사람의 말이라면 일부러라도 찾아가 듣고 싶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에 대한 인정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라틴어에 대해 쓰여있지만,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같은 인간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쌓아온 삶의 지혜를 엿보게 해 준다. 옮겨 담고 싶은 놀라운 순간들이 많지만, 그것도 내 판단이기에 말을 아끼게 된다. 조금 욕심을 내어 나와 정반대였던 인상 깊은 문장 딱 하나만 남겨둔다.


'Si vales bene, valeo.'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


타인의 안부가 먼저 중요한 그들의 인사가 따뜻하다. 나만 좋으면, 나만 잘 살면 남이야 어떻든 말든 신경 안 쓰는 나에게 어색하다. 이런 인사는 떠올려 본 적도 해 본 적도 없다. 내가 잘 있어야 남 생각이 났다. 힘들고 어려울 때 다른 이의 상황은 내 범주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하는 안부 인사는 늘 내가 좋아야 나왔다.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오랜 자세가 인사에 담겨 나를 건드렸다.


때론 부끄럽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며 책장 사이를 넘어갔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우리의 삶을 보는 느낌으로. 따스한 책으로 기억된다. 혹시 지금 춥다면 집어 들기를 권한다. 그게 날씨 탓일지 마음 탓일지 모르지만, 온도를 높여 줄 것을 확신한다.



[읽었던 그때 그 순간의 감정과 느낌]

<라틴어 수업> (한동일/흐름출판) - 2020 완독

전자책으로 읽다 보니 거의 2년에 걸쳐서 읽게 되었다. 가끔 읽을 때마다 저자의 따뜻하고 편안한 마음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졌다. 

라틴어는 무시무시하게 어렵다고 소문이 나 있고 이미 죽은 언어와 같아서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양 언어의 근원이 되는 라틴어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는 문화적, 역사적 배경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 실제로는 이 강의가 의미가 있는 이유는 저자의 인생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힘들게 공부하며 겪은 인생의 굴곡 이야기와 선배로서 학생들, 청년들을 이해하고 전하는 진심 어린 조언은 듣는 이 각자에게 소중하게 다가간다. 인생의 어디쯤 있든지 간에 이 책은 과거의,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삶을 돌아보고 생각해 보게 하는 훌륭한 책이다.

우리는 그동안 각자의 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그리고 내일도 각자의 길을 걸어간다. 그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인생이다.




읽고 남는 건 받은 질문과 했던 고민뿐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






이 브런치는 이런 곳입니다.

이 작가와 책을 만나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현실은 상상으로부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