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차, 놈놈놈
찬 바람이 불면 김장 김치만 익어가는 게 아니다.
월급쟁이들의 뒷목도 서늘하게 익어간다.
바야흐로 인사(人事)의 계절.
그런데, 요즘은 그 시점들이 특정되지 않는다.
그냥 불현듯, 느닷없이, 맥락 없이, 소식들이 들려온다.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는 대학 동기들,
올해는 유독 그 바람의 방향이 극단적이었다.
한놈은 희퇴를 하고, 한놈은 승진을 하고,
정기적으로 만나 술을 마시며 짤리면 뭐 할 거냐고 묻던 사이였는데.
나만 뭔가 트렌드에 뒤쳐지는 건가 ;
승진한 A와의 톡
내 이럴 줄 알았음. 그냥 돈 받고 나가면 딱 좋았을 텐데
뭐래, 그래도 인마, 짤려도 임원 달고 짤리는게 낫지.
그게 또 마냥 좋은 건 아니다 ;
여튼 이번 술은 니가 사라.
진심으로 축하했다. A가 지난 20년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잘 알기에,
주말 골프 접대에, 밤샘 보고서에, 윗분들 의전까지. 그는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어 그 '별'을 따냈다.
이제 그는 넓은 방을 쓸 것이고, 법인 카드의 한도가 늘어날 것이고,
누군가는 그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힐 것이다.
임원(任員)은 '임시 직원'의 줄임말이라고 한다니, 정규직이라는 방탄조끼를 벗고, 매년 성과로 생존을 증명해야 하는 파리 목숨. 그는 이제 더 높은 곳에 올라갔지만, 그만큼 더 세찬 바람을 맞아야 할 거다.
그의 승진은 '성공'일까, 아니면 '사형 집행 유예'일까.
이번엔 짤린 B와의 톡
야, 그래도 이번에 꽤 많이 주는 거 같던데, 잘했네
그러니깐, 그나마 다행임.
잘했어, 어린 팀장 밑에서 고생 많았다.
뭐 걔도 아쉬워해, 그래도 내가 후배지만 겁나 열심히 해줬음
ㅋㅋㅋ 해주다니. 당연히 해야지, 여튼 축하해 먼저 가서 잘 닦아놔
그래, 고맙다.
술은 외려 니가 사야 되는 거 아냐?
그래 ㅎ
아니다, A가 1차 사고, 니가 2차 사
너도 어영부영 그러지 말고 빨리 나와, 할거 많어
그래야지, 야, 그래도 난 A보다 니가 더 부럽다.
시끄러 ㅋ
다행히 오래전부터 얘길 나눴던 부분이라, 대화가 무겁진 않았다. 외려 홀가분해 보였다. 매일 아침 지옥철에 몸을 구겨 넣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더 이상 실적 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물론 그 웃음 뒤에 가려진 가장으로서의 막막함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번엔, B가 승리자처럼 보였다.
승진한 놈과 짤린 놈.
극단적으로 갈린 두 친구의 운명 사이에서 나는 어디쯤 서 있나.
예전 같았으면 승진한 A를 보며 배가 아파 죽었을 것이고, 퇴직한 B를 보며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졸업'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의 내 시선은 조금 다르다.
A가 부러운 건 그가 얻은 권력이 아니라, 그가 쌓아온 '증명된 역량'이다. 그는 적어도 그 조직에서 Top을 찍어본 경험을 가졌다. 그건 나가서도 큰 무기가 될 것이다. B가 부러운 건 그가 얻은 '시간'과 '자본(위로금)'이다. 그는 이제 강제로라도 새로운 판을 짜야만 한다.
결국 A도, B도, 그리고 나도. 우리는 모두 '회사 밖'이라는 같은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 기차에 타고 있을 뿐이다. A는 특실에 앉아 조금 더 멀리 갈 뿐이고, B는 조금 일찍 내려 다른 환승역을 찾는 것일 뿐.
중요한 건 '언제' 내리느냐가 아니라, '내려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아느냐다.
A는 화려한 명함에 취해 길을 잃을 수도 있고, B는 준비 없이 내려서 헤맬 수도 있다.
만약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정한 정거장에서, 내 두 발로 걸어 내리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
잘들 살아보자고, 놈놈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