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함들

문학 번역가, 수영 강사로 일하다

by 백지민

상냥함들

“다른 저녁 성인반 수영 강사 지원자는 전화를 안 받으시고…… 서류도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아서 선생님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하아…… 경력이 없으셔서 걱정이긴 합니다만…… 기대에 부응해 주시겠거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린이 수영 강사로 지원했지만, 그 자리에는 이미 선출(‘수영 선수 출신’을 줄여서 주로 이렇게 부르곤 한다) 지원자가 있어 저녁 성인반 수영 강사로 합격 전화를 받았다. 합격을 알려준 팀장님은 한숨을 쉬며 걱정을 내비치면서도, 지금 수강하고 있는 반에서 경력 많으신 선생님이 어떻게 프로그램을 짜는지 눈여겨 보고, 욕심이 있으면 저녁 성인반에 와서 참관도 해 봐라…… 하고 마치 까마득한 선배가 풋내기 후배에게 해주는 듯한 다정하면서도 우려가 섞인 조언을 여럿 해주셨다.


갑자기 돌아가기 시작한 톱니바퀴에 합격 통지를 받은 당일부터 부랴부랴 강사 슈트를 사고(수영 강사는 격한 신체 활동 없이 물에 오랜 시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슈트를 입지 않으면 매우 춥다고 한다), 눈여겨봐 두었던 수영 지도법 교재를 닥치는 대로 샀다(주변에서는 버는 것에 비해 초기 투자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며, 이게 맞느냐고 웃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운동 강사를 한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학창 시절 때 그렇게 운동을 싫어했던 내가? 수영을 가르친다고? 나 자신도 내가 저질러놓은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아 실소가 나왔다. 엄마도 얘기를 듣더니 인생 참 특이하게 산다는 얼굴로 웃었다. 사실 나는 지금 번역 업계에서 볼 때도 “수영 강사를 한다고? 뭐지……?” 싶고, 수영 업계에서 볼 때도 “통번역대학원? 영어? 번역? 뭐지……?” 싶을 정도의 황당하리만치 지덕체(智德體)가 어우러진—‘덕’ 쪽은 차치하고서라도—이력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밤에는 잠을 설치면서, 수영 슈트를 낑낑거리며 입는 꿈을 꿨다(왜 안 입어지는 거지,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이튿날 아침, 수영 강습을 해주시는 선생님께 너무 걱정된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이 매일 수업 시작 10분 전까지 오면 지도법을 알려 주겠다고 하셨다. 쉬어야 하는 시간인데, 나를 위해 시간을 할애해 주시다니, 너무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수영 자격증을 따는 과정에서 감사한 일들이 너무 많다. 인명구조요원 자격증을 따면서 주변에 힘들다고 털어놓았더니, 친구들이 멀리서 초콜릿이다 치킨이다 뭐다 기프티콘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생활스포츠지도사 자격증을 준비할 때는, 아무리 해도 실기 시험 커트라인 기록이 나오지 않아서 당시 아침 수영 강습을 해주시던 선생님께 이것저것 물어보았더니, 수업 전에 따로 부르셔서 내 영법을 촬영한 수중 영상을 함께 보면서 자세를 분석한 뒤, 자세 교정을 위해 필요한 훈련을 말씀해 주셨다(킥 강화 훈련, 접영 브레이크아웃, 즉 출수 자세 연습 등). 심지어는 따로 시간을 내셔서 수영장 레인을 하나 빌려 그 당시 내가 가장 취약했던 영법인 평영 특강도 해주셨다. 시간당 강습료를 받고 일하는 수영 선생님이신데, 나를 위해 물에 들어가서 자세를 교정해 주고 영상도 찍어 주면서 시간을 써 주셨다는 건 말도 안 되게 상냥함을 베푸신 거다. 차후에 왜 도와주셨느냐고 물어보니, 내 눈에서 절박함이 보였다고 했다.


그 밖에도, 수영 동호회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도 한없이 감사한 일이 많다. 내 수영 영상을 보고 자세를 분석해서 필요한 근력 운동을 알려주었던 친구도 있다(햄스트링을 강화해야 한다며 여러 종류의 밴드도 주었다. 그 밴드들을 훈련 중에 많이 끊어먹었지만 살아남은 밴드를 아직까지도 잘 쓰고 있다). 수영 기록을 재기 위해 수영장 레인 하나를 통째로 빌려야 하는데, 레인 대여비가 부담이 되니(한 레인을 빌리는 데 14만 원 정도였다) 다 같이 나눠 내자며, 생스지 자격증을 준비하지도 않으면서 훈련에 참여해 주는 한편, 훈련 장소까지 거리가 멀다고 그 먼 길을 기꺼이 운전해서 데려다준 친구도 있다. 그리고 자신도 생스지 자격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고 스트레스를 받을 텐데도, 아무리 해도 기록이 나오지 않는 나를 위해 내 자세를 차분히 관찰하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고 여러 가지로 조언해 준 친구도 있다. 이 상냥함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생스지 자격증을 따지 못했을 것이다.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면서 혼자 일하는 고즈넉함에 익숙해져 있었다면, 수영을 취미로 하면서, 그리고 곧 직업적으로 시작하면서는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배워나가고 있다. 수영을 하면서는 절대 내가 혼자 잘해서 딴 자격증들과 직책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많이 체감한다.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친동생이 곤경에 처한 것처럼, 수영 초년생의 어쩔 줄 몰라 하는 걱정과 당혹스러움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뭐라도 도와주려고 하는 그 마음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문은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다. 그러나 그 문을 열어주는 것은 밖의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차마 내치지 못하고 집안에 들이려는 그 상냥함이다. 어쩌면 상냥함들, 그것들이야말로 세상을 따스하게 일으켜주는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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