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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찐년 김짜이 Feb 04. 2018

[인도 라다크 여행 2] 경적을 울리지 않으면 아무도

인도여행/인도 레 여행기

이 여행에서 두 번째로 깨달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자기PR의 중요성이었다.

간신히 모인 일행이었지만 밥을 함께 먹고 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덕에 파악하기가 쉬웠다. 저녁은 윤여름이가 실력을 발휘했다. 라면스프와 면, 계란, 감자로 국수 비슷한 것을 만들어 먹고 차도 우려서 한참 마시니 좀 친해지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 8인승 차에 짐을 먼저 실었다. 운전석에 앉은 지미를 제외하고 분명 자리가 여유로워야 했지만, 한국에서도 그렇듯이 인도의 8인승도 뒷자리가 넓지는 않았다. 게다가 다들 겨울 옷을 입은 상태. 조금씩 구겨져서 차에 담긴 상태로 레를 출발했다. 작은 레 시내를 벗어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엄청나게 좋지 않은 도로가 시작되었다.


레와 레 주변의 모든 산은 전부 황량한 돌산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지 의아할 정도로 돌과 흙만 있다. 워낙 가지각각의 모양새로 생긴 탓에 구경하는 재미가 없진 않지만, 보다보면 역시 조금 질리기도 한다. 그렇게 황량한 산을 가만히 보다보면 산에 리본이라도 두른마냥 선들이 그어져 있다. 어쩌다가 우연히 선들을 발견하고 가만히 산을 바라보며 저 선들은 뭘까 하고 잠시 궁금해했었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 선 위로 차가 지나가더라. 도로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도로를 달리게 되었다.


그 도로의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1차선인 점. 한국에서라면 분명 일방통행으로 지정되었을 길이다. 그런데 큰 트럭들이 마주쳐 지나다닌다. 중앙선? 그런 건 당연히 없다. 이 지경이니 노면 또한 당연히 좋을 리가 없다. 아스팔트는 깨지고 부서지고, 갈라지고, 중간에 갑자기 흙길이 나타나기도 하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와중에 엄청난 커브길이라는 거였다.


길 앞에 난데없이 바위가 보인다. 커브길이다. 건너편 상황을 보여주는 볼록거울? 바랄 걸 바라라는 듯 없다. 오직 단 하나, 바위에 쓰여있는 "HORN" 만이 우리가 뭘 해야 할지 알려준다. 경적을 울리는 거다. 우리의 운전사, 지미는 경적을 울리는 데 한치의 고민도 없었다. 고막이 쉴 틈이 없었지만 귀를 버리느냐 목숨을 버리느냐 하면, 당연히 귀를 버릴 수밖에 없지 않나. 우리는 경적을 울릴 때마다 흠칫흠칫 놀랐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익숙해졌다.

바위가 다가온다. 어김없이 HORN 이라고 쓰여 있다. 지미가 경적을 울린다.


빠아아아아아아아앙!!!!


대부분의 경우엔 커브를 돌아도 빈 길 뿐이다. 그러나 가끔은 커브를 돌자마자 대기하고 있는 차를 발견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경적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어, 라는 말 대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대의 경우. 쁘...쁘...쁘아ㅏ아앙 하고 건너편에서 경적 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부터 가차없이 경적을 누르면서 달려오기 때문에 소리는 처음에 희미했다가 가까워질수록 커진다. 지미는 갓길에 가깝게 차를 대고 속도를 낮춘다. 그럼 바위 뒤에서 거짓말처럼 차가 튀어나와 우리를 스치듯 지나 사라진다.


그렇게 몇 번을 커브를 돌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삼백번은 못 되어도 최소한 백오십번은 되었을 거다. 그렇게 계속 몸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쏠리고 귀는 시끄럽다가 문득,


경적을 울리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구나.
내가 여기 있다고 외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묘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내가 여기에 있다고 외쳐야 하는 순간을 종종 맞닥뜨린다. 유치원에서 손들고 발표하던 것부터 시작해서, 머리가 좀 굵어진 후 친구들 사이에서의 관계를 형성할 때, 대학교에 가서 조별과제를 할 때는 물론이고, 특히 회사에서 자기어필을 해야 할 때까지. 심지어 연애를 하려고 해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려야 한다. 제가 알아요. 저 여기 있어요. 저에요. 제가 했어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제가 잘 해요. 나는 언제나 그것들을 너무 싫어했다.


그러나 차 안에서 온통 흔들리며 생각해보니, 그것들을 싫어만 해서는 될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가 여기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그것도 나를 대신할 만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거기다가 단순한 한 개의 바윗덩이가 아니라도 누군가의 시야를 가리거나 뺏을 수 있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복잡한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입을 닫고 있으면 당연히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그리고, 그렇게 입을 닫고 있으면서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건 누군가로 하여금 바위를 뚫고 볼 수 있는 시력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너무 이상한 일이 아닌가.

물론 이렇게 생각하게 되고 나서도, 어디에서든 자기를 어필하는 것은 여전히 싫다. 누군가에게 적극적인 자기어필을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하려고 쓴 글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이 작은 경험은 앞으로의 내 태도를 약간이나마 다른 길로 이끌어 줄 것 같다. 기회를 맞닥뜨렸을 때, 이를테면 바위 뒤에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동안은 물러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내가 여기에 있다고 외치는데 최소한의 거부감은 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고, 또 그러지 않으면 절체절명의 기회를 놓칠지도 모르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태도의 전환이라고 생각하니, 멀미가 그치고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소소한 깨달음을 얻었던 누브라밸리-판공초 3박 4일 여행기,

첫 화부터 보러 가기>>>>>



제목을 누르시면 해당 글로 이동합니다.

1화. 같이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2화. 경적을 울리지 않으면 아무도

3화. 거대한 바위가 아니어도 충분히

4화.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멀리 간다

5화. 기회를 영원으로 만드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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