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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역마살찐년 김짜이 Feb 23. 2018

[인도 라다크 여행 4]
쉴 때 쉬어야 멀리 간다

인도여행/인도 레 여행기

어느새 벌써 11월 중순이 지나버렸다. 퇴사를 통보한 후 억지로 참아가며 회사를 다니고 있었던, 동시에 퇴사를 하면 한 해만큼은 여행만 하며 지내겠다고 다짐했던 작년 이맘때로부터 딱 1년이 지났다. 가만히 앉아 그때를 떠올려본다. 그때도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멀리 간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어쩌면 더 오래 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산병은 참 피곤한 병이었다. 손이 많이 간다는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피곤했다. 간밤에 푹 잤는데도 아침이 되어 지미의 사륜구동에 오를 때가 되면, 꼭 술을 밤새도록 마시고 집에 가는 첫차를 탄 기분이 들었다. 적당히 몽롱하고, 몸뚱이와 영혼의 싱크로가 잘 안 맞는 듯 팔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차에 타고 가만히만 있어도 된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지만, 문제는 차에서 내려서 걸어야 할 때였다. 특히, 오르막을 오를 때. 특히의 특히, 길은 오르막인데 짐을 지고 올라야 할 때.


하루 먼저 도착한 다른 일행들은 멀쩡했지만, 딱 하루 정도만 쉬고 움직여야 했던 여름이와 방멘형님, 나는 고산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조금씩 고도가 높아질 때마다 빌빌거렸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동차 도로라는 까르둥 라를 넘을 때는 아예 산소통을 입에 대고 있었다. 고생고생하며 투르툭에 도착했을 때, 우리에게 더 큰 시련이 닥쳤다. 숙소가 다리 건너에 있어서 짐을 지고 건너간 후 계단을 올라야 했던 것.


고산병의 다른 증상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이었다. 그냥 몸만으로도 무척 무거운데 짐까지 우리를 짓누르고, 숨은 마음대로 안 쉬어지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다행히 방멘 형님은 먼저 씩씩하게 숙소로 올라갔지만, 나와 윤여름이는 고작 흔들다리 하나 건너놓고 계단참에 주저앉고 말았다.


짐을 풀어놓고 널브러지자 천천히 호흡이 제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언제 상태가 다시 나빠질지 몰라 호흡을 일부러 깊게, 천천히 했다. 상태가 호전되자 그제서야 주변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감각을 깨운 건 물소리였다. 흔들다리를 건널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우리가 건넌 계곡은 무척 깨끗하고 폭도 넓은, 멋진 계곡이었다. 수량도 많고 물이 흐르는 속도도 빨라 힘찬 물소리가 났다. 멀찌감치 서 있는 미루나무 몇 그루가 그림 같은 풍경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풍경을 감상하는데, 다리 건너편에서 뭔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였다. 여러 마리의 소가 사람보다 익숙하게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무심하게 다리를 건넌 소들은 우리가 뻗어있는 계단 바로 옆을 꾸준히 올라 사라졌다. 그다음은 지게를 진 할머니였다. 정말 호호 할머니셨는데도, 우리를 힘겹게 한 계단 따위는 별게 아니라는 듯 한 걸음씩 꾹꾹 밟으시며 우리를 지나쳐 올라가셨다.


이제 멀쩡해진 우리 차례였다. 한숨을 폭 내쉬고 나서 짐을 들쳐메는데, 확실히 처음으로 짐을 메고 출발했을 때보다 상태가 좋아진 것을 느꼈다. 언제 숨이 턱 끝까지 찼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아 놀랐다. 그냥 무리해서 끙끙거리고 올라갈 수도 있었겠지만, 제때 멈춰서 짐을 팽개쳐버린 게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먼저 간 일행을 따라 게스트하우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회사를 다닐 때는 힘들면 쉬어도 된다는 걸 몰랐다. 내가 멈춰 서면 어디서든, 누군가든, 무엇인가든 나타나서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압박감에 쫓기듯 계속 걸었다. 호흡이 가빠도 당연히 멈출 수 없었다. 어떻게 될지 두려웠으니까.


한 템포 쉬어보니 그제야 알겠더라. 소나 할머니 같은, 예상하지 못한 존재에게 추월당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빠르게 가는 것, 효율적으로 가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목적지에 잘 도착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높은 언덕에 올라야 할 때나, 짐을 져야 할 때, 시간이 급박할 때도 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한번에 욕심을 내서 가기보다는, 잠시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충전이 되었으므로 오히려 좀 더 적극적으로 쉬겠다고 말하고, 쉴 때는 정말 다 내려놓고 편하게 있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소소한 깨달음을 얻었던 누브라밸리-판공초 3박 4일 여행기,

첫 화부터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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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같이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2화. 경적을 울리지 않으면 아무도

3화. 거대한 바위가 아니어도 충분히

4화.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멀리 간다

5화. 기회를 영원으로 만드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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