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로 아이의 사춘기를 함께 버티는 일
마음이 차가운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서 한참 동안 운 적이 있었다. 마침 방에 혼자 있어서 속에서 누르고 있던 뭔가를 토해내듯 바보같이 소리 내어 울었다.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이 악물고 악착같이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모든 게 한꺼번에 덮쳐왔다.
이 문제를 같이 헤쳐나갈 남편조차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모두 내 잘못 때문에 아이가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거라고 한 마디씩 거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모두 나를 한편으로 걱정하면서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한창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고 있는 내게 그 이야기가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그땐 이미 나 스스로 엄마로서 자신을 골백번은 자책하고 난 후라 다시 나에게 잘못을 운운하며 뭘 바꿔보라고 타이를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에게 사랑과 공감을 주려면 내 안에서 나눠줄 수 있는 것들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어야 했는데, 그때 내 마음의 잔고는 이미 텅텅 빈 상태였다.
마을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동네에는 아이를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내 어려움을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무리 믿을만한 사람이라도 아이에 대해 쉽게 편견을 가지게 대할까 봐 자연스레 입을 닫았고 말수가 점점 줄었다. 나를 뒤흔들고 있는 진짜 고민이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도 아닌 척하고 일상을 살고 있으니 삶은 참 외로워졌다.
어떤 고통은 진짜 아무도 알 수 없다. 자기 연민에 빠져 엄살떠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아이의 터프한 사춘기 시절을 함께 통과하는 양육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고통이 있다. 특히 딸과 엄마 사이의 관계는 이상한 동일시 사고 회로가 작동하고 있어서, 한번 틀어지면 지독한 관계의 지옥을 경험하는 것처럼 뼈 마디마디가 아픈 정신적 피로감이 몰려왔다. 사람이 너무 마음이 처참해지면 내 속 얘기를 할 만한 사람도 없어진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더구나 우리나라처럼 주로 엄마에게 아이들 돌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떠맡기는 곳에서 엄마들이 안고 있는 압박감이나 죄책감은 무의식까지 황폐하게 만든다. 낮에는 직장에서 업무를 보고, 집에 와서는 밀린 가사 일을 해치우고, 학교를 상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하면서, 저녁에는 사춘기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는 삶을 사는 건 사람을 서서히 피폐하게 한다. 제 아무리 원더우먼이 온다고 해도 그런 스트레스를 감당하며 매일 노동 강도를 유지하는 건 너무 힘든 일 아닐까.
어느 날 점심때 다시 오랜만에 만난 비버 샘은 딸아이 문제와 직장 일로 수척해진 상태였다. 그녀가 얼마나 힘들게 버티고 있었는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떤 말은 자신 안에 아무 기력도 남아있지 않을 때 절대로 들리지 않는다. 난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의 몇몇 상태만 무상하게 얘기했다. 그녀는 숟가락질하다 말고 고개를 못 들고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차마 나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괜히 고개만 떨궜다. 그녀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다고 했다. 처음에 자신을 걱정하듯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해서만 수많은 조언을 하고 간다고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챙겨야 하는지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왜 엄마에게만 이 모든 짐이 맡겨져 있을까. 왜 아이를 키우는 육체적 정신적 돌봄 노동이 모두 엄마라는 한 사람에게만 맡겨져 있을까. 학교 교사들도 아이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사회적인 시선도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자연스럽게 엄마의 양육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 아빠들은 함께 가정을 돌보는 사람임에도 어떤 면에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 발 뒤로 빠져있다. 아이가 다 큰 것처럼 보여도 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일이다. 오히려 아이가 어릴 때만큼 육체적으로는 덜 힘들지 몰라도, 청소년기 아이를 키우는 일은 정신적으로 많은 감정을 쏟고 시간을 쏟아야 하는 일이다. 왜 모든 사람이 엄마가 변해야 아이들이 바뀐다는 당연한 말을 하면서, 엄마가 어떤 상태로 버티고 있는지 한 번도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아이와 똑같이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엄마도 질풍노도의 길을 걷고 있다. 엄마가 어른으로 버텨낼 만한 힘이 있어야지 아이도 부모에게 마음을 기대며 버텨낼 수 있다. 이 사회에서 여성에게 드리운 짐이 너무 무겁다.
내가 심상하게 말했던 힘든 시절의 기억이 누군가에게 잠시라도 숨 쉴 구멍이 될 수 있다는 게 한편으로 참 신비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모든 경험은 다 의미가 있다는 걸까. 말해주면 도움이 될만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비버 샘을 안아주었다. 마르고 지친 얼굴로 어떤 시간을 잘 버텨내고 있는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다 지고 있을 필요 없다고, 너무 힘들면 자신을 내려놓고 조금은 쉬라고, 그러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할 만한 기운이 생기면, 그저 아이를 말없이 꽉 끌어안아주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교육과 양육이 힘든 이유는 인풋을 주면 아웃풋이 금방 나오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풋을 정성 들여 오랫동안 주면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려야 한다. 그럴 때 간신히 작은 싹을 보게 되기도 하지만 그 싹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마르는 것을 목격할 때가 부지기수다. 실망했지만 다시 시작하고, 또다시 실망하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매일같이 삶에 물을 주고 햇빛을 준다. 시간을 느리게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