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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 Apr 15. 2019

그 껌 씹으면 안돼~~

아이돌 조공의 민낯

팬클럽을 관리하는 회사다 보니 담당 연예인 인터뷰에 팬레터 주소로 우리 회사 주소가 나갔다. 팬들은 그 주소가 매니지먼트 회사 주소인줄 알았겠지만, 실은 우리 회사 주소였다. 회사에는 이틀에 한번씩 우체국에서 자루가 배달되었다. 그 자루 안에는 전국 각지에서 답지한 수많은 아이들의 마음이 들어 있었다.

그 마음은 편지로, 액자로, 그림으로, 손수 만든 소품으로, 초콜릿으로, 과자로, 사탕으로 하여간 온갖 것들로 바뀌어 들어 있었다. 

그 자루들은 우리 회사에 부려져서 매니저들을 기다렸다. 매니저가 와서 그 중 정말 멋진 그림이나 이건 안주면 안되겠다 싶은 물건(고가의 선물이나 정성이 들어간 선물)만 따로 챙겨 갔고, 그 외에 남은 건 우리더러 처분하라고 했다. 이틀에 한번 꼴로 포대자루가 왔으니, 하루종일 잠 잘 시간도 없이 스케줄을 소화해내는 가수들이 그 많은 편지를 한 장 한 장 뜯어서 읽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요즘에야 SNS가 있어서 댓글을 달면 밴 안에서라도 연예인이 직접 보지만(그래도 수천 수만개의 댓글을 다 보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때는 그럴 수도 없었다.

나도 중학생 때 가수 이선희(네네, 이승기의 그 이선희 선생님요! 우리땐 아이돌이었다고요.)에게 팬레터를 보낸 적이 있는데, 여기 와서야 내 편지는 이선희 손에 가지도 못했겠다는 걸 깨달았다.

그나마 우리 회사는 팬클럽과 공생하는 사이였기에, 받은 편지를 바로 갖다버리거나 폐기처분하지는 않았다. 행여 그런 모습을 팬클럽에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가수별로 분류해서 얼마간 보관했고, 드물게 신인가수의 경우 모두 전달했다. 같은 그룹이라도 멤버마다 팬의 숫자가 달라서, 인기 없는 멤버에게 편지가 오면 따로 빼놨다가 주기도 했다.

가수에게 가지 못한 선물, 매니저조차 거부한 선물은 우리가 썼다. ^^;;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은 실용적인 문구류나 귀여운 팬시상품 같은 것들이다. 그런 건 회사 책상에 놓고 쓰거나 집에 들고 가기도 했다. 초콜릿과 과자류도 꽤 많이 와서 간식으로 먹었다.

낱개 껌 하나하나가 이런 식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이미지는 구글 검색)

발렌타인데이 근처의 어느 날, 너무나 예쁘게 포장된 박스를 열었더니, 껌이 하나하나 다른 색지로 포장되어 하트 모양으로 담겨 있었다. 하나 까서 입에 넣으려는 순간 “안돼~~ 먹지 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요?” 했더니, 자세히 보라고, 그거 침 묻힌 껌이라고 했다. 에엑!!! 이게 뭔 소리야? 

다시 자세히 봤더니, 껌이라면 으레 하얀 분이 덮여있기 마련인데, 그 껌에는 하얀 분이 없었다. 깔 때 포장지가 산뜻하게 떨어지지 못하고, 늘러붙은 느낌이 들었다는 걸 뒤늦게 기억해냈다. 

“애들이 이거 그냥 보내는 줄 알아?
우리 오빠랑 간접키스 하고 싶다며
하나하나 지 입 속에 넣어서 빨고
다시 포장해서 보내는 거야. 조심해.”


으아아아...그런 드러운 짓을 하다니!! 경악과 공포였다. 아무리 니네 오빠가 좋다지만 이건 너무 한 거 아니니?

그때 이후 나는 감식안을 가지게 되었다. 입에 넣었다 빼도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는 사탕이나 껌 종류가 침 묻히는데 가장 많이 애용됐고, 초콜릿은 잘 녹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하얀 분이 묻어있지 않은 껌이나 포장지를 비틀어 묶은 사탕은 가차없이 버렸다. 

그래서 회사 직원들이 봉지를 뜯을 수 없는 완성품 과자류는 잘 먹어도, 포장이 정성스럽고 예쁜 사탕이나 껌에는 손도 대지 않았구나 알게 되었다.

초콜릿은 잘 녹기 때문에 입에 넣었다 빼는 짓은 잘 하지 않았다.


동방신기 음료수 사건 이전에도 미친 팬들은 이런 짓들을 종종해왔다. 

이런 걸 보면 연예인들도 참 극한직업이다. 

하긴 서태지와아이들 은퇴 발표 뒤에 극성팬들이 서태지의 집을 쳐들어가 온갖 것을 다 가져갔는데, 그 중에는 변기 타일을 뜯어간 팬도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 날 우리 매장에 카세트 플레이어만 있었더라도....


또 다른 종류의 극성팬이지만, 좀 귀여웠던 일화도 있다. 

회사에는 매장이 있었다. 면접 보는 날, 창고인 줄 알았던 그 공간은 알고보니 연예인 브로마이드와 배지, 문구류 등을 팔던 매장이었다. 본격적으로 장사를 한 건 아니지만 하루에도 몇 명 씩 팬들이 방문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념품을 주거나 굿즈를 팔기 위해 한가한 직원이 매장에 나가서 지키곤 했다. 

어느 날, 매장을 지키고 있는데, 애들이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언니, 카세트 없어요? 카세트?” 물어보는 거다. “없어. 왜?” 했더니,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좀 있으면 우리 오빠들이 은퇴한다고 발표한지 1년째 되는 시간이란 말이에요. 그 시간에 맞춰서 굿바이 앨범 들으려고 학교도 안가고 여기 왔는데...진짜 카세트 없어요?” 란다.

서태지와아이들 팬이었다. 그날이 1년 전 서태지와아이들이 은퇴 기자회견을 했던 1월 31일이었고, 시간까지 맞춰서 우리 회사에 와서 음악을 들으려 했던 것이다.

나는 요 앞 골목에 가면 음반가게가 있으니 거기 가서 부탁해보라 하고 보냈다.

애들은 쫓아보냈지만, 오빠들이 알든가 모르든가 상관없이, 나의 애정을 표현하고, 내가 생각한 기념일에 맞춰 의식을 거행하려는 애들이 귀여웠다. 우리에게 카세트가 있었더라면 그 테이프 틀어줬을텐데, 못틀어줘서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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