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시청권에 논쟁에 단상
생물학에는 ‘흔적 기관(Vestigial orga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진화의 긴 여정 속에서 쓰임새를 잃어버려 본래의 기능은 상실하고 그 형태나 흔적만 덩그러니 남은 신체의 일부를 뜻하죠. 인간의 꼬리뼈나 맹장 끝의 충수돌기 같은 것들을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흔적 기관이 비단 생물학적 육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매일 숨 쉬며 살아가는 사회, 문화, 그리고 산업의 생태계 속에서도 본질은 멸종하고 껍데기인 ‘이름’만 살아남은 기묘한 언어의 관성들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어요.
가장 흔한 일상의 예가 ‘연필(鉛筆)’입니다. 단어에 쓰인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납(鉛)으로 만든 붓(筆)입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실제 납덩어리를 뭉쳐 나무판에 글씨를 쓰곤 했는데, 그때의 이름이 그대로 내려온 거죠. 쓰던 물리적 행위의 흔적입니다. 16세기 영국에서 흑연이 발견된 이후, 우리가 쥐고 쓰는 연필에는 단 1그램의 납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흑연으로 글을 써온 지 수백 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흑연필이 아닌 연필이라 부르고 있죠. 본질이 달라졌지만, 기능이 동일하니 그대로 쓰는 것뿐입니다.
밤거리를 화려하게 수놓는 ‘네온사인(Neon sign)’도 마찬가지죠. 예전엔 다양한 색깔을 내기 위해서 네온 가스를 유리관에 채워 넣고 고전압을 가해 빛을 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네온사인은 무거운 전력 소모와 안전 문제로 거리에서 사실상 멸종했죠.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화려한 간판의 99퍼센트는 가볍고 효율적인 LED 조명입니다. 발광의 원리와 재질이라는 본질이 완전히 다른 기술로 교체되었음에도, 사람들은 특유의 감성과 형태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네온사인이라는 이름을 관성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냥 입에 익은 단어를 쓰는 것뿐이죠.
자동차 엔진의 출력을 나타낼 때 실제 말이 끄는 힘과 비교할 일이 전혀 없음에도 여전히 '마력(馬力)'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나, 물리적인 나무 책갈피가 없음에도 웹 브라우저의 URL 주소를 저장하며 ‘북마크(Bookmark)’를 한다고 표현하는 것, 죽간이나 양피지 같은 두루마리가 없는데도 스마트폰 화면을 위아래로 쓸어 넘기며 ‘스크롤(Scroll)’을 내린다고 말하는 것 모두가 비슷한 맥락입니다. 심지어 원치 않는 디지털 메시지를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차별적으로 배급되던 통조림 햄의 브랜드인 ‘스팸(Spam)’이라 부르기도 하죠.
미디어 시장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이제 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미디어 산업 곳곳에도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넷플릭스나 유튜브에서 새로운 콘텐츠가 공개될 때 ‘개봉(開封)’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원래 개봉은 극장에 도착한 물리적인 필름 통의 봉인을 뜯어내는 행위를 말했습니다. 필름통의 봉인을 틀어야 상영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지금은 모든 영상이 디지털 파일(DCP)로 암호화되어 전송되거나 클라우드 서버의 접속 권한을 여는 방식으로 바뀌었죠. 그러니 단어 그 자체의 개봉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린 콘텐츠가 세상에 처음 빛을 보는 그 순간을 여전히 개봉이라는 단어에 고스란히 남겨 두었습니다.
초창기 카메라에 달린 손잡이(크랭크)를 직접 돌려 필름을 감던 행위에서 유래한 '크랭크 인(Crank-in)' 역시, 디지털 메모리 카드로 촬영하는 지금도 영상 제작의 시작을 알리는 굳건한 용어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글쓰기 분야에서도 물리적인 빨간 네모 칸 원고지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텍스트의 분량을 가늠하는 직관적인 도량형으로 '200자 원고지 매수'가 쓰이고 있기도 하고, ‘구독(購讀)’ 역시 살 구(購)에 읽을 독(讀)을 쓰며 종이 신문이나 잡지 같은 실물 인쇄물을 돈 주고 사서 읽는 행위를 뜻했지만, 지금은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듣고 심지어 자동차의 열선 시트 기능을 켜는 데까지 구독이라는 말을 씁니다. ‘읽는다’는 물리적 행위의 본질은 증발했고, 정기적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의 ‘접속권’을 누리는 디지털 시대의 핵심 비즈니스 모델 자체를 뜻하는 단어로 진화한 셈입니다.
본질은 달라졌지만 관례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이 되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건 기술의 발전 속도를 인간의 인식과 언어가 따라가지 못해 생겨나는 이러한 현상들이 대체로 무했습니다. 낯선 기술과 새로운 비즈니스를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인식시키기 위해 과거의 친숙한 껍데기를 빌려오는 인간의 지혜이기도 하죠. 그러나 어떤 흔적 기관은 단순한 은유를 넘어, 시대의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과거의 낡은 외투에 절박하게 매달리는 안쓰러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국 미디어 산업에서 가장 모순적인 흔적 기관, 바로 ‘지상파(Terrestrial)’라는 호칭이 그렇습니다.
지상파의 사전적, 기술적 본질은 명확합니다. 방송국 송신탑에서 공중으로 전파를 쏘아 올리고, 시청자는 각 가정의 지붕이나 베란다에 설치한 안테나를 통해 그 전파를 ‘직접 수신’하여 텔레비전을 보는 구조입니다. 땅 위로 흐르는 전파를 공공재로 사용하여 누구나 무료로 방송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 이것이 지상파라는 이름에 담긴 숭고한 본질이죠. 여전히 전파는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그러니 물리적으로 지상파 방송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안테나를 통해 지상파 방송을 직접 수신하는 가구의 비율은 3퍼센트 내외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97퍼센트의 시청자들은 IPTV, 케이블 TV, 위성방송 같은 유료방송망에 돈을 내고 가입하여 방송을 보거나,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통해 OTT 플랫폼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죠. 즉, 물리적인 전송망이자 플랫폼으로서의 ‘지상파’는 소중하고 의미 있으나 그 수명이 다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그 가치를 지키고 시장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송망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쓰는 비용을 보면 알 수 있죠.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차마 언급하지 못할 정도로 경미합니다. 그러니 이미 그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는 세인들의 평가는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뜻이 바뀌었습니다. 실질적으로 그들의 정체성은 과거 아날로그 시절 리모컨의 10번대 안팎, 이른바 ‘황금 앞채널’을 선점했던 거대 콘텐츠 사업자(CP)이자 레거시 사업자를 지칭하는 용어일 뿐입니다. 남이 깔아놓은 인터넷과 케이블 망 위에 훌륭한 콘텐츠를 태워 보내는 수많은 사업자 중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 어제 일이 아닙니다.
본질이 이토록 크게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굳건한 ‘지상파’라 칭합니다. 연필이나 안경처럼 관성적으로 쓰이는 무해한 수준을 넘어, 생존의 위기 앞에서 과거의 찬란했던 이름표에 애처롭게 매달리는 쪽에 가깝지 않을까요? 이들은 낡은 규제의 틀 안에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할 순간이 오면 '지상파'라는 이름을 부적처럼 꺼내 들곤 합니다. 최근에 나온 '보편적 시청권' 논쟁에서도 지상파란 단어는 어김없이 나옵니다. 지상파 직접 수신 가구가 3~50% 넘는 나라에서나 하는 지상파 우선주의가 겨우 3% 내외의 시장에서 방패처럼 등장하는 것이죠.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가적 메가 스포츠 이벤트의 중계권을 논하거나, 비대칭적인 비즈니스 규제를 방어할 때마다 그들은 "국민 누구나 무료로 차별 없이 시청할 수 있는 보편적 시청권을 보장해야 하므로 지상파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시청자들은 그 보편적 시청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유료방송이나 OTT에서 지상파를 보는데도 말이죠.
비즈니스 구조를 들여다보면 씁쓸함과 안쓰러움이 교차합니다. 97퍼센트의 국민은 유료방송에 매월 시청료를 지불하고 접속합니다. 그리고 방송사들은 그 유료방송 사업자들(IPTV 등)을 상대로 자신들의 콘텐츠를 싣는 대가인 이른바 재송신료(CPS)를 매년 받죠. 국민은 유료방송에 돈을 내고, 유료방송은 이들에게 돈을 내는 철저한 상업적 B2B 구조가 엄연히 존재합니다. 스스로 전파를 쏘아 직접 국민에게 도달하는 3퍼센트의 빈약한 길만으로는 자생하기 어렵기에 유료방송 사업자의 망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무료 보편적 시청권의 수호자’라는 낡은 외투를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할 때마다 '지상파'란 흔적기관을 소환하는 거죠.
이는 러시아 역사에 등장하는 ‘포템킨 마을(Potemkin Village)’을 떠올리게 한다. 18세기 러시아의 포템킨 장군은 황제 예카테리나 2세의 크림반도 순시를 앞두고, 헐벗고 빈곤한 실상을 감추기 위해 도로변에 가짜 건물 정면(파사드)만 화려하게 세워놓은 세트장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겉보기엔 번듯하고 활기찬 마을이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에 불과했습니다.
한국의 방송이 부르짖는 보편적 시청권과 공적 책무라는 명분 역시 거대한 포템킨 마을과 무척 닮아 있습니다. 전파라는 공공재를 통해 전 국민에게 무료로 닿는다는 명징한 레토릭은 있지만, 실제로는 직수신율 3퍼센트라는 빈 숫자만 남아 있는 것이니까요. 정작 시청자들은 각자 요금을 지불하고 유료방송과 OTT라는 다른 튼튼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름표가 본질을 가리고, 과거의 향수가 현실을 덮는 생태계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지 않을까요? 플랫폼의 국경이 붕괴하고 알고리즘이 편성을 대체하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 망가진 안테나와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세운 포템킨 마을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직접 수신 가구 3%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권리를 행사하게 할 방법은 지상파가 아니더라도 여러 옵션이 있을 수 있죠. 방송법이 보편적 시청권을 수신 가구를 100%가 아니라 90%라고 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보편적 시청권 문제가 지상파여야 한다거나, 지상파와 비지상파를 구별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될 겁니다. 공동이든 단독이든 대세감을 확보할 수 있는 중계권과, 모든 경기를 볼 수 있는 편성의 문제 등이 핵심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보편적 시청권 개정 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
1) 일본의 J-콘소시움과 보편적 시청권
2) 중계권 혼란과 BBC의 중계권 편성
3) 유럽이 정한 보편적 시청권 이벤트
4) 동계올림픽 사상 최고의 수익을 거둔 NBC 중계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