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시청권에 대한 논의 4+1
WBC가 한창이다.
평탄한 인생은 행복할지언정 영화가 되지 못하듯, 굴곡 많은 인생은 힘들지만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 이번 WBC가 그랬다. 확률적으로 희박했던 가능성을 기어코 확보해서 8강에 진출했으니 그보다 더한 짜릿함은 없을 터다. 바라보는 우리도 즐거웠지만, 중계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흐뭇했을 거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서너 시간의 중계가 가지는 경제적 힘은 무시할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이번 WBC 중계권은 KBS, MBC, SBS 그리고 CJENM이 나눴다. OTT인 티빙은 전 경기 중계를, KBS, MBC, SBS는 국대 중계에 집중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큰 틀에서 중계권 자체를 1/N로 나눠서 가져오다 보니, 가장 시청률이 많은 경기를 누가 독점한다거나, 국대 경기를 나눠서 편성한다거나 하는 무리수를 논의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중복 중계는 디폴트다. 오히려 같은 경기를 누가 더 잘 중계하느냐를 가지고 차별화 포인트를 잡기도 했다. 각 사별로 전문 해설사를 고용해서, 일종의 시청률 경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질문? 동일한 방송을 여러 방송사가 중복 편성하는 것은 보편적 시청권을 확보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 답은 '관련 없다'다. 우리나라 보편적 시청권 제도는 대상 이벤트를 선정해 두었을 뿐, 어떻게 편성할 것인지 등등에 대한 세부 계획은 제도화해 두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세월 동안 중복 방송은 당연한 것이었고, 더러 미디어 학자를 중심으로 시청자의 다양성이 축소된다는 주장은 있었지만,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행자가 다르니 그것 자체가 또 다른 다양성이 아니지 않냐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절대 기준이 없으니, 그것조차 다양성이라고 주장하면 계위의 문제일 뿐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다행스러운 건 이번 WBC 중계와 관련해서는 지난 밀라노 동계 올림픽 때와는 달리 보편적 시청권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단독 중계보다는 공동 중계가 보편적 시청권에 부합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생각이 연장된다면, jtbc가 단독 중계권을 가지고 있는 월드컵의 경우에도 어떤 식으로든 재중계권을 판매/구매해서 공동중계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거나, 혹은 앞으로 중계는 공동 중계를 해야 한다고 할 개연성이 있다. 벌써 일부 국회의원은 입법화를 진행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빠른 답을 하기 전에, 조금 다른 상상을 해 보자. 만약 jtbc가 WBC를 단독 중계했다면, (일부러 이슈를 삼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올림픽처럼 보편적 시청권 문제가 불거졌을까?
1) 2023 WBC vs. 2026 WBC
먼저 과거 사례부터 보자. 2023년 WBC는 (유료) 지상파 방송사업자가 중계권을 확보했다. 총 47경기 중 한국전 4경기와 결승전 이상 총 5경기를 중계했고, 이 5경기는 모두 중복 편성을 했다. 전체의 89%에 해당되는 42경기는 중계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네이버, 아프리카 TV 등에서는 무료로 전 경기를 중계했다. 그러나 시청률은 여타 다른 프로그램 대비 높지 않았고, 국대가 탈락하자, 지상파 방송사업자들도 중계를 중단했다. 총 47 경기 중 겨우 다섯 경기만을 중계했지만 보편적 시청권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2026 WBC 중계에는 네이버, 카카오 같은 포털이 빠지고 티빙이 들어왔다. 티빙은 유료 서비스다. 여전히 한국이 등장한 경기는 모두 중복 편성이 되었고, 티빙에서만 전경기가 중계되었다. 23년 무료 포털 서비스 대비 26년 유료 OTT 서비스가 전 경기를 제공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보편적 시청권 문제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한국 경기가 방송사업자를 통해서 중계되고 있으니, 그것으로 최소 요건은 갖추었다고 보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유럽에서도 모든 스포츠를 보편적 시청권 대상에 놓지 않는다. 반드시 중계해야 할 것들은 국대경기와 결승전 정도였다. 아무리 좋아한들 남의 잔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밀라노 올림픽 중계 때는 jtbc 단독 중계가 보편적 시청권에 부합하지 않았다고 성화였는데, 더 많은 중계가 유료 OTT에서 진행되었는데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프로그램 다양성은 축소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중계 대상의 특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올림픽 vs. 단일 스포츠 중계
올림픽은 수십 개의 종목이 24시간 내내 여기저기서 펼쳐지는 '분산형 종합 스포츠 이벤트'다. 무엇보다 올림픽은 월드컵이나 프로 스포츠와 달리 종목 자체에 대한 강력한 고정 팬덤이나 특수 팬층이 두텁게 존재하지 않는다. 평소 양궁, 사격, 펜싱과 같은 종목을 꾸준히 소비하는 팬은 지극히 적다. 그렇기에 보통의 우리는 특정 경기를 미리 선점해서 보기보다는 TV를 켜둔 채 채널을 돌리다 흥미로운 종목이 나오면 멈춰 서는 '랜덤형 시청'이나 방송사가 보여주는 흐름을 따라가는 '플로우(Flow) 시청'을 주로 한다.
그러기에 여러 방송사가 중계했을 경우 종합 시청률이 높을 수 밖에 없다. jtbc가 독점 중계한 이번 밀라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겨우 1.8% 시청률을 기록했던 것에 비해서, 2022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 방송사 합산 18%를 기록했고, 2014년 소치 올림픽 개막식은 11% 내외를 기록했고, SBS가 단독 중계한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개막식은 11.3%를 기록했다. 공동 중계가 상대적으로 시청률이 높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KBS, MBC, SBS의 평균 시청률보다 올림픽 개막식 시청률이 높은 반면에, jtbc의 독점 중계는 jtbc 평균 시청률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밀라노 동계올림픽에서 JTBC가 단독 중계를 했을 때 "올림픽 분위기가 안 난다"는 말이 나왔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올림픽은 단순히 경기를 중계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가 축제 속에 있다는 '공감대'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마치 크리스마스 시즌에 거리에 캐럴이 가득 울려 퍼질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체감 분위기가 전혀 다른 것과 같다. 도처에 올림픽 소식이 편재(遍在)되어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실감을 하게 된다.
하지만 한 채널은 수백 개의 경기를 모두 담아낼 수 없는 물리적 한계가 명확하다. 특정 종목을 중계하는 동안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메달 소식은 자막으로만 처리될 수밖에 없고, 시청자가 채널을 돌려도 다른 종목을 볼 수 있는 선택지가 없다 보니 축제 전체의 현장감을 느끼기 어렵다. 즉, 올림픽에서 단독 중계가 위험한 이유는 단일 채널이 지닌 한계로 인해 시청자에게 제공되는 종목의 '다양성'과 '랜덤 시청의 기회', 그리고 사회 전반에 흐르는 '축제적 편재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기 때문이다.
반면 월드컵은 전형적인 '집중형 스포츠 이벤트'다. 시청이 대회 기간 내내 고르게 분산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대표팀 경기라는 특정 시점에 모든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결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WBC 등에서 시청자의 수에 민감한 방송사업자들이 굳이 수익을 나눌 수밖에 없는 중복 중계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대로 단일 사업자가 중계를 했을 경우에는 그 수익이 그대로 단일 사업자의 몫이 된다.
이러한 집중도는 수치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독일전 시청률은 66.7%였고,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전은 지상파 3사 합계 시청률이 무려 71%에 달했다. 최근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우루과이전 역시 밤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실시간 시청자가 1,000만 명을 훌쩍 넘겼다. 월드컵 시청은 철저히 '경기 중심'이다. 시청자들은 경기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직접 채널을 찾아가는 능동적인 태도를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월드컵의 경우 '어디서 하느냐'가 국민적 관심도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SBS가 단독 중계를 했을 때도 한국전 시청률은 50~60%대를 기록하며 뜨거운 열기를 유지했다. 콘텐츠 자체가 가진 힘이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전국 송출만 보장된다면 단독 중계라고 해서 국민이 경기를 놓치거나 소외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TV 조선이 A매치/친선전을 중계해 왔지만, 종편 평균 시청률 대비 높은 시청률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앞 번호인 유료 지상파 방송이 아니라고 해서 문제가 된 적도 없다.
이 맥락에서 보면 SBS가 자사 케이블 채널을 모두 동원해서 전 경기를 중계한 것처럼 jtbc가 자사의 5개 채널을 모두 동원해서 전 경기를 중계할 경우에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순 있다.
정리를 해 보자
일단 대세감이 필요한 건 올림픽이지만, 모든 경기를 다 중계하지는 않는다. 국대 경기만 중요한 건 WBC였고, 월드컵은 국대 경기의 시청률이 압도적이긴 하지만, 다른 경기도 제법 시청률이 보장되기 때문에 전 경기를 모두 방송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모든 방송이 실시간일 필요는 없다. 국대 경기는 실시간이어야 하지만, 다른 조의 경기는 시차 상의 이슈 등등으로 인해서 녹화 방송을 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올림픽은 중복 중계가 대세감을 형성하는데 일정정도 기여하는 반면에, WBC와 월드컵은 상대적으로 중복 중계 여부가 크게 중요하진 않다. 올림픽은 일부 경기를 제외하고는 팬심이 떨어져서 무료 여부가 중요하지만(관심도 별루인데, 유료면 보겠는가?), 집중형 콘텐츠는 유료 OTT라는 것이 큰 문제화되지는 않았다.
다만, 국대 경기는 한국에서의 보편적 방송 서비스인 유료방송 (지상파가 아니라) 채널에서 나와야 할 필요는 있다. 물론 이 모든 경우에도 실제 지불된 중계권료만큼의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그건 어디까지나 중계권을 구매한 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니 말이다.
이런 특성을 감안하면 보편적 시청권 제대를 개정할 때는 다음의 조건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스포츠의 성격에 따라 보편적 시청권 대상 리스트의 범위를 정하자. 올림픽, 단일 경기, 국대 경기 등등
중계 범위를 명확히 하자. 예를 들어 단일 스포츠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국가 대표의 경기와 결승전은 반드시 유료방송 채널로 중계되어야 한다거나, 국대 경기를 제외한 다른 경기는 녹화 중계 혹은 하이라이트가 제공되어야 한다거나, 혹은 전체 중계가 반드시 필요하다거나 하는 룰이 필요하다. 여기서 bottom line은 대한민국 국가 대표 경기는 반드시 중계. 결승전 정도는 반드시 중계 정도가 아닐까 싶다. 덧붙여 하이라이트의 경우에는 중계권을 확보하지 못한 공영방송 (지상파 전부가 아니라 수신료를 받는 KBS에게는 반듯이) 에게 전체 분위기를 조성하는 목적으로 무조건 제공하여야 한다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계 범위가 명확해지면, 사업자의 편성 계획이 나온다. 이 편성 계획에 대해서 개별 사업자가 중계권 협상을 벌이기 이전에 위의 bottom line의 준수여부와 이행 계획을 사전에 요구하고, 최소 중계 조건을 맞추지 못했을 경우에는 중계를 중단할 수 있는 권리를 규제당국에 부여한다.
처음 던졌던 질문을 소환해 보자.
만약 jtbc가 WBC를 단독 중계했다면, (일부러 이슈를 삼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올림픽처럼 보편적 시청권 문제가 불거졌을까?
내 대답은 '아니다' 다. 스포츠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고, 국대 경기만 중계해도 사람들이 크게 문제삼지 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복이 아니라 단일 편성만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다른 사업자가 뉴스나 하이라이트를 제공한다면 더더욱.
"지상파니까 무조건 줘야 한다"는 프레임 자체는 의미가 없다. 지상파 역시 유료 방송 플랫폼에 실려 전송되는 현실에서, 지상파만을 성역으로 취급하는 것은 디지털 시대의 미디어 생태계를 부정하는 일이다. 오히려 민간 사업자의 창의적인 중계 기술(멀티뷰, 데이터 야구 등)과 OTT의 편의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반드시 유료방송 채널 및 수신료를 징수하는 KBS에게 제공되어야 할 bottom line (예를 들어 하이라이트나, 뉴스용 클립 등등)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2026 월드컵을 계기로 보편적 시청권 논의가 시청자의 실질적 권익과 방송 산업의 건강한 발전을 도모하는 유연한 제도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bottom line'의 명확한 설정을 통해, 국민 모두가 월드컵이라는 축제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보편적 시청권 개정 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
1) 일본의 J-콘소시움과 보편적 시청권
2) 중계권 혼란과 BBC의 중계권 편성
3) 유럽이 정한 보편적 시청권 이벤트
4) 동계올림픽 사상 최고의 수익을 거둔 NBC 중계사업
5) 월드컵은 단독 중계를 해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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