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셋째 주 아침의 훈연된 피톤치드 향일 지도 모릅니다.
좋아하는 향기가 특별히 있으신지?
내가 좋아하는 향기 중에 하나는 비 온 다음 나무에서 나는 냄새다.
아니 4월 셋째 주 아침 바람에 함께 코끝으로 흘러들어오는 피톤치드 향이다.
음, 더 구체적 취향을 밝히자면 훈연된 피톤치드향을 좋아한다...라고 하면 너무 변태적인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향기론 대체할 길이 없고
조금이라도 잘못 생각하면 편집증스러울 수도, 변태스러울 수도 있는
위험한 이 주장을 설득시키기 위해
이렇게 구체적이고 지엽적인 향기를 좋아하게 된 몇 가지 포인트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해 보는 설명회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0. Intro.
음악을 감상하면서 기분을 돋우어 보면 약간 공감 및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첨부한다.
<블루파프리카, 봄처럼 내게 와>
https://www.youtube.com/watch?v=ce3M93xpb9M
1. Exclusive perfume
삼월, 초봄이 지나 본격적으로 '봄'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계절이 되고,
새싹들이 풀이되어가며 풍기는 풋풋한 향기는
사월에만 가능한 익스클루시브 한정 혜택이다.
삼월엔 고작 떡잎 두어 개뿐인 새싹 조무래기들이라
이렇다 할 향기를 담아 산소를 뿜을 깜냥이 안되거니와
오월엔 풀이 우거져 약간은 보기 징그럽기도 하고,
사실 엄밀히 말하면 오월이 되는 시점부터는
풀 내음보다는 꽃향기가 우세해지는 시점이기 때문에 그렇다.
2. Mixture of Memories.
나의 마음도 그러하다.
특히나 이러한 향기에 대한 기억은
추억이 버무려져야 더 깊은 향기로 기억되는데
아마 이러한 향기는 오전에 캠퍼스나
데이트하기 좋은 산책로 등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보통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오전에 이러한 냄새는, 아니 이런 향기는 도통 맡으려야 맡을 수가 없다.
휴일에는 늦잠을 자는 특권을 사용해야만 하고
평일에는 풀 냄새는커녕 출근길 대중교통의 살벌한 냄새 또는
차 안의 익숙한 냄새, 매연 에어컨 개밥 쉰 냄새 등등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좀처럼 이러한 향기는 맡을 수가 없고,
추억 보정이 들어가며 이 향기는 더욱 각별한 것이 된다.
3. Time Limited
사월 셋째 주인 이유는 그 시점에 그 향기가 더 애틋해지기 때문인데
보통 4월 셋째 주 경에는 중간고사가 있다는 것이 지금은 가물가물해졌지만,
대부분의 중, 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교 시절의 그때는
한창 학업에 매진해야 할 때로 강제되기 때문에 더 애틋해졌는지 모르겠다.
모두가 그랬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특히 나로서는 이런 중간고사 기간이 되면 공부를 제외한 내 주변 모든 것이
정말 하나하나 소중해지고 관심이 가고 흥미롭던지!
주변의 돌멩이 하나의 쪼개진 모양과 화강암 특유의 경도와 모양에 감탄하며,
개미 한 마리의 동선과 부지런함과 자기보다 큰 모래알을 들어 번쩍번쩍 옮기는
턱관절의 엄청난 힘까지도.... 사월 셋째 주가 되면 유독 관심이 왕성해지는 시기가 되곤 했던 것 같다.
시험 기간에 치어서 잠시 엉뚱한 딴짓과 상상에 빠져있다 번뜩 현타가 오면,
아. 이런 봄날을 즐기지 못하고 슬피 우는 청춘이여.라고
끼룩끼룩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던 그 애틋함이 섞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시간이 끝나면 마법의 시간이 끝나 듯,
아무런 감흥이 없어져 버려 일상으로 돌아가 소중함은 사라지고 말기에 더욱 한정판일 수밖에 없다.
4. Morning Glory
아침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데 바로 이산화탄소를 내뿜기 때문이다.
사실 풀잎이 내뿜어봤자.. 지만
보통 어디서 주워들은 과학적이지만 잡스러운 잡학 지식들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도 않고 평생을 장기 기억 속에 남아
클리셰처럼 관련 이야기 소재가 나오면 툭툭 조건 반사하듯
무지성으로 입에서 튀어나오기 마련이니 뭐 그러려니 하자.
음. 약간 그런 느낌처럼 말이다.
설탕 덩어리 과즙음료에 합성이긴 하지만 비타민C가 들어있다는 홍보문구를 보며
비타민C가 내 몸에 들어오고 있어~
아~ 난 건강해지고 있어라고 MSG를 치는 그런 맛?
5. Crunch Sound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사각사각 한 풀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약간의 기억을 첨가하자면, 사각사각 한 풀 바람 소리는 군대에서 아침 구보를 하면 군화의 척척 소리와
궁합이 잘 맞는 느낌인데,
봄날 아침 알통구보를 하며, 간부가 안 보이는 연병장 측면 가장자리 산책로를 돌며
헉헉대며 투덜댔던 욕쟁이 선임의 한 마디가 그 풀잎 바람 소리와 함께 떠오른다.
"아유 XX럴 공기는 X나게 좋네."
6. Ripening Temperature
사월 셋째 주는 향기를 감상하기에 적절한 온도이기도 하다.
아침은 약간 쌀쌀한지, 아니면 푹한지 감이 안 와
새 봄맞이 새로 장만한 외투를 걸치고 나가야 하나 아니면 반팔을 입고 나가야 하나 고민하다
반팔과 아직 새것인 서걱거리는 외투를 함께 들고나가며
새로운 옷을 두 개나 입은 설렘과 어우러져 향기를 감상하기 적절한 마음가짐이 되게 된다.
7. Newly Released Color
보이는 것 또한 향기 감상의 조연 포인트인데,
요지는 꼭 사월의 잎 색깔 이어야만 한다.
삼월은 너무 창백한 그린이라 연해서 감흥이 없고,
오월은 너무 징그럽게 커버린 듯 짙푸르러 버렸던 것 같다.
8. Smoked, Individualized.
본격적인 장비를 하고 가는 산이나
제주도의 비자림 같은 본격적인 공원... 까지 뻑적지근하게 가서
대놓고 목적을 정해놓고 가서 맡는 피톤치드 향이어서도 안된다.
약간은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공원이나, 어딘가로 가고 있는 산책로,
1교시 중간고사를 치르러 가는 학교 공원이나, 버스 정류장 옆 나무와 잡초가 자라서
거기서 담배 태우기 딱 좋은, 뭐 그런 쪽에서 은근히 풍겨 나는 담배 향과 섞여서 나는 훈연된 풀잎 향기는,
약간 코를 찡그리게 만들 수는 있어도, 나름의 기억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서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향기 배합이 중요한데, 10% 이상을 넘으면 곤란하다.
물론 이건 개인적인 취향을 타는 부분이지만, 향수에도 그렇지 않은가.
정말 매력적인 향수에는 약간의 악취가 섞여 있다고.
뭐 그런 느낌으로 이해해달라고 하면, 너무 멀리 온 걸까.
아마, 사월 셋째 주 아침의 피톤치드향을 좋아하게 된 건
이 잎사귀가 어린 삼월의 새싹처럼 귀엽게 기억해 봐줄 만한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월의 꽃을 피우진 못한,
아. 지금은 그저 보잘것없어 보이는 여기저기 치이는 '풀떼기'로만 여겨졌던
내 풋풋했던 청년 날의 모습과 비슷해서
그 향기를 기억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