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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비 그리고 바람
Jun 06. 2024
1000걸음, 12분, 70kcal, 동네 두 바퀴
내가 디지털 디톡스로 들어가는 숫자다. 나는 허리 디스크 이후 틈만 나면 산책을 한다. 보통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데 요즘은 스마트 워치 하나만 차고 동네를 돌아다닌다.
오늘도 어슬렁어슬렁 돌고 있다. 그것도 뒷짐을 지고 다닌다. 뒷짐 지고 다니는 게 어깨가 펴지고 허리를 펼 수 있다고 하여 실천 중인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동네 아저씨라는 오명을 벗기는 어렵겠지만 걸음에도 여유가 생기고 어깨도 시원했으니까.
스마트폰을 두고 왔음에도 폰이 마렵다. 있지도 않은 호주머니 위로 손을 가져간다. 진동이 울리고 있는 듯한 착각 때문이다. 디지털 디톡스가 건강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있었던 이탈리아 출장 때문이다. 시차도 다르고 전화가 오면 바로 로밍으로 이어진다는 여성의 안내음이 전화를 쉬게 했다. 오로지 출장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이탈리아라는 나라에만 만끽할 수 있었다.
전화 올 사람이 없다는 게 이렇게나 행복하다니. 그간 겹겹이 끼여있던 직장과 현업의 굴레가 두터웠음을 직감했다. 밀라노 어느 골목도 유럽임을 감각하게 해 주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한국인처럼 폰에만 의존하는 사람이 적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니는 사람도 거의 보지 못했다. 디지털에 대한 의존도가 월등히 낮은 듯 보였고, 그만큼 여유는 넘쳤다.
한국에 와서 실감했다. 성질 급한 한국인들이 여기저기서 보내는 수신음에 정신이 번쩍 든다. 잠시도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광고와 알림음이 이내 나를 삶의 자장 안으로 끌고 갔다. 아 여기가 바로 한국이고 내가 사는 곳이구나. 잠시간의 일탈이 꿈이었음을 직감했다. 알고 지내던 익숙함이지만 계속 이대로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마찬가지.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익숙한 곳에서 어색함을 느끼기 위한 여정의 시작 말이다. 오늘도 아파트 현관을 나섰다. 뒷짐을 진다. 해도 진다. 낮이 길어서 그런지 아직 충분히 밝았고 즐길 수 있을 만큼 더웠다. 가벼운 몸만큼이나 생각도 가뿐하다. 어디선가 맛있는 찌개 냄새가 바람을 따라 풍겼다. 욕심부리지 말고 1000걸음, 12분, 70kcal, 동네 두 바퀴만 돌다 가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