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예요, 렌트예요?
영국에 오래 살았지만 아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다. 다른 영어권 나라에 비해 한국인들이 많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괜히 반갑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다. 신기하게도 내가 만난 한국 사람들은 내가 영국에 오래 살았다는 걸 들으면 집은 자가인지 렌트인지 많이들 물어보곤 한다. 아마 외국에 나와 살면서 집 없는 설움을 많이 겪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집이 있다고 하면 정착했구나 싶어 부러워하고, 없다고 하면 안쓰러운 눈빛을 보낸다.
나는 결혼 전부터 당연히 내 집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건축업을 해서 우리 식구들은 자주 이사를 하며 새집에서 살던 기억이 있고, 언니, 동생도 다 부모님이 주신 집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집은 당연히 내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할 때 나는 집을 살 수 있을 만큼 모아놓은 돈도 없었고 남편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양가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했다. 부모님이 조금씩 도와주셔서 전세가 높지 않았던 홍제동 빌라를 얻었다.
영국에 갈 때 이 전세금을 빼서 이주 자금으로 썼다. 영국에 가서 돈을 벌지 않았던 일 년 정도는 이 전세금으로 렌트와 생활비를 다 충당해야 했다. 영국은 워낙 물가가 높은 나라 중 하나라서 돈을 벌지 않고 쓰기만 하니 잔고가 바닥나기 시작했다. 남편은 대학원에서 심리학 공부를 하고 싶어 했지만, 곧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식당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직업 없이, 준비 없이 해외를 가게 되면 하는 게 이런 식의 아르바이트겠지만 서른이 넘은 성인이 하기에는 힘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남편은 곧 전기 기술자가 되겠다고 근처 직업학교에 등록을 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전세금은 교육비로 나가게 되었다.
영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계속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기 때문에 나는 일 년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쉴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일 년 정도 지내다 살던 동네 회사에 취직을 했다. 한국에서는 내가 어느 정도 벌어야 하고, 어느 수준의 브랜드를 써야 하고 등등 나 스스로 갖고 있던 것들이 있었지만 영국에서 나는 그냥 외국인이기 때문에 나에게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굴레를 씌우지 않을 수 있어 참 편하게 살았던 것 같다. 남편은 교육을 마치고 전기 기술자가 되었고, 나도 임신을 하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시댁에서 집을 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삼 년 정도 지나면서 내가 헛된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내가 느꼈던 분노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고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자라면서 부모님이 남자라고 동생을 편애했고 경제적으로 많은 지원을 해주셨는데, 나는 그런 부모님을 원망했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내 남편도 아들이니 시댁에서 우리 부모님이 내 동생에게 해줬듯이 그만큼의 지원을 해줄 거라고 당연히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쓸모없는 걸 원하는 것도 아니고 살 집이니 당연히 우선순위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부모님의 생각이나 생활 방식은 우리 원가족과 달랐다. 지금 돌이켜 보면 왜 그랬을까 싶은데 저런 집 남자랑 결혼해서 내 인생이 진창에 빠졌다는 말할 수 없는 열패감에 피를 토할 것 같은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결혼 전 시댁에서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나중에 집을 해주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 이제는 꿈과 같은 허상이 되고 보니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고 모든 화살을 남편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나와 달리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순응하며 사는 사람이라 내가 이제 아이를 가졌으니 난 일 안 하고 아이만 키우면서 살겠다고, 남편이 돈 벌어오는 걸로만 먹고살겠다고 강짜를 부렸다. 남편은 내가 뭐라고 하든 거의 대부분 그렇게 하라고 하는 사람이라 어떻게든 남편 속을 긁고 싶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여러 번 부렸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렇게 받아줬기에 내가 마음 놓고,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집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집을 살 수 있는 목돈이 없다. 대체로 이민 오는 분들을 보면 없는 돈에 와서 식당 같은 곳에서 일하면서 열심히 돈을 모으는 분들도 있지만, 요즘은 직업도 좋고 돈도 넉넉히 있는 분들이 와서 자리를 잡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에 한국에서 돈을 가지고 와서 곧 집을 사는데, 그러다 보니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괜히 주눅이 들기도 한다. 내가 출산하고 얼마 안 있어 시아버지가 영국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내가 집값이 계속 오르니 집을 샀으면 좋겠다고 하니 불편해하면서 왜 집이 필요하냐고 하시는데 말문이 막혀서 그다음부터는 시댁에서 경제적으로 도와줄 거라는 기대를 접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은 약속하셨으니 나에게 계속 시댁 어른들께 집 해달라고 얘기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도 참 상처가 되었다. 아들에게는 다 해주면서 딸인 나에게는 시댁에서 받으라고 하니 섭섭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동안 시댁이나 친정에 다 연락을 하지 않았고 5년 넘게 한국 방문을 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 고아와 같다고 생각했던 시기였다.
영국에 온 지 거의 15년이 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제야 내 생각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는 집을 살 돈도, 능력도 없다는 걸 인정하고 그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해 계획을 했었어야 했다. 땅이 있으면서도 팔아주지 않는 시부모를 원망했고, 집이 있는데도 팔아서 도와주지 않는 부모를 원망만 하며 내 30대와 40대를 보냈으니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너무 아깝기만 하다. 물론 지금도 내 집이 있으면 좋겠고, 그래서 사람들을 초대해 식사도 대접하고 웃으며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소망이 독이 되지 않도록 내 마음을 지키며 살고 싶다.
집이 없는 것이 나를 작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집에 대한 집착과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내 집을 가지고 싶다는 소망은 있지만, 그 소망이 독이 되지 않도록 마음의 균형을 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존재와 소유의 가치 가운데 외줄 타듯이 위태로운 날도 있지만, 내가 이룬 것과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무엇보다 내가 깨달은 것은, 부모님의 도움은 감사한 것이지만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부모님 돈은 부모님 돈이지, 부모님이 날 도와줘야 한다고 강요하고 안 도와주면 좋은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집이 있든 없든,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 때때로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드는 날도 있지만, 내가 살아있고 남편과 딸이 있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하려고 한다. 이렇게 소중한 것들을 이미 가지고 있음에도, 없는 것에만 매달려 스스로를 괴롭혔던 시간들이 후회스럽다. 내 가치는 내가 가진 재산이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나는 있는 그대로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다.
어쩌면 집을 소유하는 것은 내게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꿈에 매달려 나 자신을 괴롭히고 부모를 미워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결국 삶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관한 것이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내 마음이 집을 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되지 않도록 삶을 더 사랑하며 나를 다독이며 살아가려 한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디모데후서 2장 20절-2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