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도 이른 나이에 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갖고 싶다는 바람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인생이 힘든데 굳이 아이를 가져 더 힘들게 살 필요가 있을까,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니 꼭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예의상 어린 아기를 보면 귀엽다고 했지 내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자격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빠의 욱하는 성격, 엄마처럼 따뜻하게 공감하지 못하는 성향 등이 내 안에도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아이를 사랑으로 키울 자신이 없었다.
계획하지 않았지만 늦게 서른아홉의 나이에 출산을 하게 됐다. 물론 영국에서는 마흔 넘어 출산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노산이 아니라고 했지만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은 기적이라고 무척 기뻐하셨다. 내 딸은 예정일이 지나고도 나올 기미가 없어서 42주째 되는 날 유도분만으로 출산을 했다. 임신하고 살도 많이 쪄서 아이가 크게 나올 줄 알았는데 2.9킬로의 작은 아이였다. 출산하고 아이와 병원에 누워 있는 첫날밤, 아이가 너무 작고 눈만 커서 외계인처럼 보였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뻐한다는데 나는 내 아이가 예쁘기보다는 살가죽이 뼈에 붙어 마르고 살은 다 허옇게 일어나 있어서 솔직히 무서웠고 내가 과연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첫날밤의 무서움과 막막함은 다행히도 사라지고 둘째 날부터는 아이가 뭘 하든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남편은 경쟁하듯이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안고 스킨십도 많이 했는데 사랑은 표현할수록 는다는 말처럼 딸에 대한 사랑은 내 걱정과 무색하게 점점 자라났다. 나는 내가 듣지 못했던 부모님의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고 싶어서 넌 엄마의 기쁨, 아빠의 자랑, 하나님의 선물이야라고 매일 얘기해 주고 노래도 해주었다. 엄마는 처음부터 아이는 잘 못 본다고 산후조리하러 와주지 못한다고 미리 얘기하셔서 기대도 하지 않았고 시어머니는 원래 몸이 약하셔서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남편과 내가 아이를 돌봐야 했다. 남편이 일 마치고 와서 많이 도와줬는데 출산 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남편이 한국에 급히 들어가서 나 혼자 아이를 봐야 했다.
남편은 남편대로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마음의 상실이 컸을 텐데 나는 나대로 독박 육아로 힘들어서 서로에게 날이 서있는 채로 지냈던 것 같다. 돌아보면 남편이 무던히 많이 참아줬던 것 같다. 바빴던 부모님 덕에 나는 부모님과 제대로 된 시간을 보낸 추억이 없어서 돈이 없더라도 아이와 시간을 더 보내겠다고 했고 남편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물론 취업을 하더라도 영국은 보육 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별로 남는 게 없어서 이렇게 결정하기가 더 쉬웠던 것 같기도 하다.
덕분에 아이를 데리고 동네마다 있는 다양한 아이들을 위한 모임들에 가서 딸 또래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많이 알게 됐다. 나는 성취욕이 강한 편이라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면서 모임도 만들기도 하고 여기저기 알아봐서 엄마들과 다니기도 하며 나름 잘 지냈던 것 같다. 영국에서는 세 살 생일이 지나면 일주일 15시간 무료 교육이 가능해서 딸을 집 근처 초등학교 안에 있는 널서리에 보내기 시작했다. 하루 세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꿀 같은 휴식이었다. 그러다 다음 해 9월부터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여섯 시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남편은 일을 찾아 가계에 도움이 되라고 했고 나 역시 머리로는 취업을 해야지 했지만 곧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아이들 학교에 있는 시간이 여섯 시간밖에 안 되고, 한국과 달리 방학이 중간중간 1,2주씩 있고 여름 방학도 길어서 직장을 다니려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영국은 아이가 어릴 때는 집에 혼자 두면 안 되기 때문에 방과 후나 방학 때는 클럽이나 차일드마인더를 찾아 아이를 맡겨야 하는데, 그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중 임신했을 때 한국 빵이 너무 먹고 싶어서 유튜브 보면서 베이킹 시작했다. 빵 굽고 케이크 만드는게 재밋어서 는데 이걸로 집에서 만들어 팔면 어떨까 싶어 홈베이킹 사업을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는 아이와 하루 종일 붙어 있다 보니 아이 잘 때 유튜브로 아이싱 쿠키 만드는 걸 봤는데 너무 예뻐 보여서 한 일 년 정도 유튜브를 보다 따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예쁘게 나와서 내가 소질이 있나 보다 싶었다.
취미가 직업이 된 케이스라 무척 좋았는데 문제는 생활비를 벌 수 있을 만큼의 활동이 되지 않았다. 내가 사는 동네는 부유한 동네에 속하는 편이 아니라 예쁘다고 연락하면서도 가격을 늘 깎아 달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용돈 벌이밖에 되지 않아 결국은 학교 보조 교사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긴 시간 일하기에 익숙했기 때문에 보조 교사일에 아이싱쿠키까지 만들어 팔았는데 결국 교사를 시작하면서 시간이 되지 않아 베이킹은 접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했다면 아이싱 쿠키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사람들과 가격 흥정을 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 큰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홈베이킹 도전은 결코 손해만 본 경험은 아니었다. 내가 만들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스트레스를 받을 때 아이싱 쿠키에 색칠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도 친구 생일이나 아는 사람 집에 초대받을 때, 내가 만든 쿠키를 가져가면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 도움이 된다. 딸아이도 친구 집에 갈 때 "엄마, 이거 만들어줘!"라고 부탁할 때가 많다. 아이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는 점에서 큰 만족감을 느낀다. 비록 아이싱 쿠키로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집에 머무는 동안 아이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어쩌면 내가 만약 어려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다면 지금처럼 아이를 이해하고 사랑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늦은 결혼과 늦은 출산이 오히려 더 맞았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아이와 함께 성장하고 있으며, 이제는 친구처럼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으니 감사할 뿐이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시편 1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