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다양한 케이블채널과 종편에서 매일매일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내지만, 내가 어렸을 때의 유선방송은 그렇게 다양한 채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몇 안되는 채널 중에 내가 언제나 끼고 살았던 채널은 클래식 영화채널이었다. 전대미문의 걸작부터 도대체 답이 없는 비디오용 영화들 까지 거의 마구잡이로 틀어주던 채널이었다. 그리고 나는 저 고색창연한 영화들을 보며 혼자의 시간을 버텼다. 전주만 들으면 누구라도 계단을 뛰어올라가고 싶게 만드는 가슴뛰는 OST의 <록키> 시리즈도, 양복입은 우아한 아저씨들이 벌이는 냉혹하고 삼엄한 권력투쟁 영화 <대부>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도굴꾼인데 자연과학대 교수라고 자칭하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도 나는 이 채널을 통해서 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내 마음을 홀렸던 영화들은 40~50년대 흑백영화, 그 중에서도 느와르 영화였다.
<말타의 매>, <카사블랑카>, <빅 슬립>, <하이 시에라>에 나왔던 험프리 보가트는 어릴적 내 마음에 불을 질렀다. 특히, 그가 입고 다니는 옷과 그가 달고 사는 파이프 담배, 그리고 맥주에 끌렸다. 중절모에 트렌치 코트를 쓴 험프리 보가트가 파이프 담배를 물고 바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장면은 ‘남자’가 가져야 할 모든 멋을 함축하고 있었다. 나는 집안에 굴러다니던 나팔 장난감을 입에 물고 담배를 피우는 포즈를 취하다가 따라놓은 우유를 마시면서 험프리 보가트를 흉내내곤 했다. 나는 성인이 되면 꼭 트렌치코트를 입고 바에 앉아 멋들어지게 맥주를 마셔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키가 대한민국 남자 평균보다 작으며(즉 트렌치코트를 입으면 환경미화를 하게 된다. 트렌치코트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주량이 아니라 치사량을 계산하는게 더 빠를 정도로 술에 약하다. 대학교 1학년 때, 신입생 환영회에서 500cc 두 잔을 마시고 바닥이 나에게 덤비는 경험을 한 뒤로 나는 마시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많이는 안 마시려고 한다.
옛날 미국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대부분 버드와이저 맥주를 마신다. 편의점에서 버드와이저를 사서 마신 그날의 느낌은... 음.... 국산이랑 뭐가 다르지? 였다. 어차피 나는 마시는 걸 좋아할 뿐 많이는 못 마시니 마실 때 맛있는 걸 마셔야 할 것 아닌가. 그때부터 맥주를 공부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트에서 10000원에 4캔 하는 맥주 아무거나 집어와도 대부분 맛이 괜찮다. 그 정도만 마셔도 삶에서 새로운 흥분을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아주 오랫동안 나와 함께 할 맥주 하나를 발굴해낸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더운 여름날 밤 샤워를 마친 뒤 예능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보며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마실 때의 쾌감은 아, 이만하면 살만하다, 라는 뿌듯함을 준다.
삶의 질을 올리기 위한 몇 가지의 방법. 그 중의 하나는 나의 입맛에 맞는 맥주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맥주를 냉장고에 쟁여두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이 조금은 살 만 해지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