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휘바 Oct 30. 2022

죽음이 지워주는 슬픔

코로나로 인해 3년 만에 찾은 한국에서 한 달 반을 보내고 뉴욕행 비행기를 타던 날, 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비행기에서 좀 자보겠다고 전날 밤을 꼬박 새웠는데 새벽 내내 불안함에 시달렸다.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또 3년 동안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도 무의식이 경고했다. 어느새 익숙해진 아파트 단지 풍경 위로 떠오른 달을 보면서 나를 다독였다.


포근한 친정집에서 나와 꼬박 하루가 걸려 도착한 뉴욕 아파트에는 온기가 없었다. 남편이 급하게 구한 아파트에는 전날 산 침대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바닥에 멍하게 앉아있다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몸은 기진맥진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슬픔에 절여진 정신은 잠의 세계로 가기에 너무 무거웠다. 먹먹한 그리움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한숨만 쉬길 수차례, 오랜만에 절망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다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울다가 잠에 빠져드는 찰나였다. 마음을 무겁게 누르던 그리움이 푸르르 날아가고 있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깜깜한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었다. 잠들기 전보다 기분은 훨씬 괜찮았는데 잠이 서서히 날아가면서 다시 슬픔이 내려앉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 불빛이 차갑고 외로워 보였다. 다시 파도처럼 밀려오는 슬픔에 적셔지기 전 죽음에 대한 명상을 시작했다.


우울증을 겪을 때는 잠이 유일한 안식이었다. 다음날 눈을 뜨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잠은 훌륭한 도피처였다. 죽음도 잠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잠에 들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삶이 아무리 애달프고 슬퍼도 언젠가는 잠에 들듯이 죽음에 빠져 모든 것을 잊을 것이다. 괴로움이 조금 옅어졌다.


어릴 때 아빠를 잃은 나는 아빠의 소재가 항상 궁금스러웠다. 아빠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환생을 해서 새로운 무언가로 살고 있을까? 천국에 가있을까(다행히 우리 아빠는 지옥에 가있으면 어쩌나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착한 사람이었다)? 영혼으로 내 주변을 맴돌고 있을까? 그런 물음들은 사라지는 모든 것들로 확장되었다.


가지를 떠난 잎들은 어디로 갈까? 바람에 여기저기 굴러다니다가 마침내는 어느 나무 밑이나 풀뿌리 곁에 누워서 나릿나릿 삭을 것이다. 그러다가 새봄이 오면 뿌리에 흡수되어 수액을 타고 새로운 잎이나 꽃으로 변신할 것이다. 그렇다. 가지에서 져 버린 나뭇잎처럼, 떠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서는 더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내가 사랑하는 모두와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이 여기에 있는 지금은 그리움보다는 사랑에 잠겨야 하지 않을까.


잠도 자고 명상을 한 나는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렸지만 여전히 우울했다. 남편은 침대에서 나오길 거부하는 나를 어르고 달래 센트럴 파크로 데려갔다. 가을의 센트럴 파크는 놓치지 않길 다행이라고 안심할 만큼 예뻤다. 가을 햇빛이 주스를 흘리고 간 것처럼 노랗고 빨간 자국이 지천이었다.


노란 잎사귀가 꽃잎처럼 날리는 벤치에 앉아 Bill Withers의 Hello Like Before를 들었다. 무지개가 피어나는 소리가 났다. 작은 새들이 바삐 날아다니고 도토리가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강아지들은 땅에 코를 묻고 다녔다. 아름답게 사라지는 것들 투성이인 세상이 아쉽고 사랑스러웠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대체된다. 슬프면서도 기뻤다.


영화 Palm Springs가 떠올랐다. 똑같은 하루 안에 영원히 갇혀서 오히려 자유로워진 주인공들은 장난을 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하루에 지쳐버린다. 남편과 영화를 보고 우리가 저렇게 오늘 안에 갇혀버린다면 어떤 기분일까라고 얘기를 하다가 어떤 깨달음이 왔다. 매일 매 순간이 소중한 이유는 다 지나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늙어간다는 것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된 것이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은 일시적이고 연약하다. 그래서 눈부시게 아름답다.


어린 왕자는 육신을 묵은 허물에 비유했고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삶과 죽음에 초탈했기에 전 우주를 제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슬프면서도 자유로웠다. 어린 왕자처럼 주위 세계의 아름다움을 알아본다면 늙음에 굴복당하지 않을 수 있다. 늘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는 이에게 세상은 계속해서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영원한 젊음은 그 마음가짐에서 온다.


Fulkee Grevile이라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인은 Caelica라는 소네트에서 죽음의 순간에 주목했다.


죽음 속에서 삶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는 자는 그것이 한때 숨결이었던 바람이란 걸 알게 된다. 새로운 이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고, 오래된 이름은 이미 사라졌다. 세월은 육신을 쓰러뜨리지만, 영혼은 죽지 않았다. 독자여! 생전에 서둘러 영원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라.


나라는 사람의 아이덴티티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입자가 우연히 한 시공간에서 만나서 생겨났다. 그리고 죽음이 오면 나를 구성하고 있던 입자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져 세상이 될 것이다.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동생은 벌써부터 보고 싶다며 울었다. 나는 울음을 꾹 참고 말했다. 우리의 헤어짐은 일시적이라고. 


우리가 지옥불 속에서 다시 만나든 천국의 솜사탕 같은 구름 위에서 재회하든 별의 조각으로 우주 속을 유영하든 우리는 그 광활한 흐름 속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죽음은 영원으로 가는 통로다.

이전 07화 나는 너와 함께 걷는 죽음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