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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망 Nov 18. 2019

알리 아저씨의 집

행운은 정말 알 수 없는 모퉁이에서-

지난 달에 삶, 삶, 삶을 두 번에 걸쳐 기록한 다음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졌다. 해당 글을 작성한 그 주 토요일에 서명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부동산에서 갑자기 금요일에 연락이 와 '미안하지만 집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집을 넘기고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이봐요 아저씨, 말이 안 되잖아요. 독일에서 이렇게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해서 계약서의 pdf를 보내고 조항에 관련하여 질문하는 과정에서 일방적 통보로 압자겐(Absagen)을 할 수 있는 거냐고 따져 물으니 자기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Es tut mir leid, 유감입니다 만 반복했다. 저 문장은 자신에게 잘못의 책임이 없을 때 사용되곤 하는데 잘못 남발할 경우 극강의 분노가 차오르는 마법의 문장으로, 나는 이번 기회에 그 분노를 절실히 느꼈다. 더 많은, 어이없는 일이 있었으나 자기가 이득일 때만 친절했던 부동산 아저씨는 이쯤에서 보내주려고 한다. 더 길게 내 기억에 남겨 봤자 정신건강에 이로울 게 없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서류에 '먼저 서명을 안 했으면 도루묵'인 것이다. 휴. 


나와 미래의 홈메이트는 깊은 좌절을 느꼈다. 외국인이라 어쩔 수 없는 벽들에 부딪쳐가며 이뤄냈다고 생각한 과제의 문지방 앞에서 주저앉아야만 하는 그 허무함이란. 애초에 집에 마음에 든 것도 아니었잖아, 하고 H는 나를 위로했다. 네가 날 설득할 땐 언제고? 우리는 다시 각자 하루에 두 시간 정도를 할애하여 집 매물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체감상 더 힘든 것 같았다. 멘탈이 나가버려서 그런 건지, 원래도 잘 안 오던 부동산의 답장이 이번에는 더 안 오는 것 같고 그래서 더 슬프고 짜증나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질 때 쯤 또, 별 생각 없이 들어가 본 사이트가 있었다.


아직도 나에게 연락이 없는 그곳, 학생처


https://www.kstw.de/


도시마다 학생들의 편의를 위한 학생처가 존재한다. 이곳 쾰른도 마찬가지로 기숙사, 학생식당, 장학금, 상담 등의 영역을 아우르는 학생처가 있다. 인터넷 사이트로 들어가서 기숙사 신청도 할 수 있고, 개인이 제공하는 방/집 매물도 확인하여 콘탁을 할 수 있다. Privatzimmerangebot으로 들어가서 지역을 설정하고 본인의 조건에 맞는 방을 들어가는 것도 좋다. 이 방법에 대한 인포는 따로 작성하여 다른 게시글에 올리도록 하고, 지금은 집을 구한 내용으로 다시 돌아가겠다.


아무튼 상기한 사이트에서 괜찮은 위치의 방 두개짜리 Wohnung을 발견하여 연락을 했고, 구구절절이 쓴 이메일이 먹혔는지 다음 날 바로 언제 시간이 가능하냐, Besichtigung(방문)을 언제 하고 싶냐는 내용이 답장으로 도착했다. 이 메일을 몇 명한테 보냈는지 모르기 때문에 반응속도가 생명이었다. 이메일을 쓴 날은 11월 7일이었고, 자정을 갓 넘긴 시간이었다. 그 날 아침 일찍 바로 답장이 도착했기에 나는 바로 그에 대한 답을 보냈다. 목요일이었기 때문에 이번 주 안에 끝장을 보자는 생각으로 오늘 당장과 내일 시간이 된다고 적었다. 사이트상에 올라온 Mietvertrag이 시작될 수 있는 날짜가 01.11.2019로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 뿐만 아니라 집 주인도 빠르게 해결하면 할수록 좋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결과는 성공적, 오후에 온 답장에는 내일(금요일) 오후에 해당 주소 건물 앞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걸 기다리는 하루가 어찌나 길던지... 부동산과의 계약이 엎어진 지 딱 사흘째였다. 다음날 만난 나와 H는 밤미테와 보증금도 우리의 기준에 적절하니 집이 쓰러져가는 초가집만 아니면 그 자리에서 집주인과 계약서를 써버리자고 다짐했다. 정말 계약서를 제외한 모든 서류를 다 챙겨갔다. 직접 만든 Selbstauskunft는 물론이고 보증인 서류, 계좌내역, 학생증명서, 신분증 사본... 등등등. 더 준비해오라고 할 것도 없게 말이다. 파일에 곱게 끼워서 목표물을 향해 출발한 우리는 세상에, 30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다. 주변 환경이나 돌아보자며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왔는데도 약속시간이 10분은 더 남아 있었다. 집 앞에 서있어 보자, 하는데 곁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서 누가 내렸다. 직감적으로 집주인임을 알고 얼굴에 미소를 장착했다. 악수를 권하며 자신을 '알리'라고 소개하는 아저씨는, 내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독일 사람'의 외형과는 다소 먼 인상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바로 집을 열고 들어가는 아저씨를 따라 들어간 Wohnung은 정말 깨끗하고 좋았다. 벽도 깨끗했고 곰팡이도, 결로도 없었으며 거의 새 것과 다름없는 Einbauküche까지 들어가 있었다.


H는 내가 여태 보지 못한 환한 웃음으로 이 집이 너무 마음에 든다는 말을 연발했다. 나는 '그치? 집 좋지?' 하는 아저씨에 동조하며 이것저것 부가적인 것을 물었다. 관리비에 들어가는 항목과, 언제 이사할 수 있는지 등등. 나도 집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자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열쇠를 오늘 줄 테니까, 짐을 옮기든지 어떻게 하고 계약서를 15일 부터로 쓰자. 계약서 쓰고 싶으면 쓰러 갈래? 하고. 나와 H는 상상만 했던 상황이 너무 갑작스레 온 것에 대해 굉장히 놀랐다. 서로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대답했다. JA, Gerne. 알리아저씨는 자신의 집으로 가서 부인 분도 만나보고 계약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작성하자고 했다.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 동네는 쾰른 내에서도 주거지역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다시 말해 비싸고 좋은 집들이 조용하게 늘어서 있는 그런 곳. 아저씨가 주차하는 곳 옆에 얌전히 앉아있던 고양이가 우리가 내리자 어디론가 호다닥 달려가는 게 보였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신세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집은 기대도, 생각도, 상상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살아온 동안 본 집 중에서 제일 좋은 집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엄청난 집 말고, 직접 본 현실의 집 중에서. 어마어마하게 넓은 거실과 중앙홀이 있고 페르시아 풍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벽난로가 있었고 잘 쪼개 놓은 장작들도 그 곁에 놓여 있었다. 차 마실래, 커피 마실래 하는 아저씨의 질문에 차를 부탁드렸고 부인 분은 반가운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해 소파로 안내해 주었다. 나와 H가 소파에 앉아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는 동안 주방에서 유기농 생강임을 강조한 생강차를 끓여 온 아저씨가 사프란 덩어리를 함께 내 왔다. 내 인생 또 최초의 경험이었다. 사프란 덩어리와 생강차라니. 온갖 과자와 과일을 내 온 아저씨가 창문을 열자, 아까 달려갔던 고양이가 자연스럽게 집으로 들어왔다. 아, 아저씨네 고양이었구나- 


아저씨가 계약서를 가지고 와 우리에게 보여주고 먼저 작성하는 동안 우리는 아주머니와 좀 더 대화를 나누었다. 아주머니는 크로아티아 출신이고, 아저씨는 이란 출신이라고 했다. 독일 대도시의 한가운데에 있는 주거지역에 세 개의 다른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독일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인식하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큰 문제 없이 계약서를 작성하고, 담소를 나누고, 인사를 한 뒤 나오니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똑같은 계약서를 두 개 작성해서 각자 나누어 가진 뒤 아저씨는 열쇠를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건네주었다. 오늘부터 당장 가서 청소를 해도 되고, 짐을 가져다 놓아도 되고, 잠을 자도 된다고. 다만 계약서의 날짜는 15일부터 시작이니까 움멜둥은 그 날 이후에 할 수 있었다. 보증금은 15일까지만 보내주되 빠르면 좋긴 하지만 부담을 갖지는 말라고 했다. 11월의 미테는 반만 내라고도 했고. 


이 현실을, 열쇠가 우리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우리는 그 길로 다시 새 보금자리로 향했다. 집을 한 바퀴 더 둘러보고 나와 문을 잠그며 든 기분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것이었다. H는 당장 짐을 옮겨야 했고, 나는 아직 살고 있던 방의 계약을 Kündigen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H부터 먼저 짐을 옮기기로 했다. 




지난 8월, 처음으로 우리에게 집을 주기로 했던 독일인 아주머니는 계약서를 메일로 보내주기로 하고 사흘 뒤에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는 내용을 보냈다. 그 집은 원래 내가 살던 동네로, 걸어서 7분이면 가는 거리였다. 독일식 3층에 위치한 다락집이었는데 부엌이 넓어 좋았고 가구들이 들어가 있어서 또 마음에 들었었다. 다만 집이 구조가 애매하고 다소 좁은 점, 그리고 하이쭝이 전기하이쭝이고 수도세가 미테에 들어있지 않은 점 등이 마음에 걸렸던 차였다. 그럼에도 밤미테가 650유로에 달해 전기세를 추가로 내면 배보다 배꼽이 클 것 같아서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우선 동네가 조용하고 안전한데다 바로 옆에 레베가 있는 점을 들어 결국 계약을 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와 계약에 대해 말할 땐 아무 말도 없던 아주머니가, 사흘 밤을 지내보니 자신의 일터 - 아주머니는 치료사로 그 건물의 땅층에 살며 개인사무실을 같이 운영하는 중이었다 - 가 있는 건물이기 때문에 우리 둘이 살게 되면 시끄러울 것 같아서 안 되겠다고 이메일을 통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말이야 방구야 정말. 나와 H는 두 명이 Anmelden을 하면 세금을 더 내야 해서 그런 것이 분명하다고 심증을 굳혔다. 그렇게 첫 번째 계약이 엎어졌다.


두 번째 계약의 기회는 앞선 포스팅에도 언급한 독일인 학생의 Nachmieter로서 들어가는 집이었다. 언제 집주인을 만날래? 하길래 답장을 두 번이나 보냈음에도 결국 잠수이별로 끝난 이야기는 이제 고 기지배의 이름과 똑같은 이름만 만나도 도끼눈을 뜨게 할 정도로 짜증나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두 번째 계약은 없어졌다.


세 번째는 이 글에 쓴 부동산 아저씨의 난 아무것도 모르쇠 사건이다. 그렇게 치사하게 돈 벌어서 많이 먹고 잘 살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독일인과의 계약도 어이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 속물적으로 말하자면 - 독일인이 아닌, 독일에 사는 부자 이주민 집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11월 17일로, 정식 계약이 시작된 지 사흘째다. 내일 월요일이 되면 나와 H는 거주지 이전을 위해 Amt를 다녀올 생각이다. 우편물을 수령하는 주소에 대한 것들도 해결해야 할 것 같다. 바빠지겠지만 지난 몇 달에 비하면 정말 행복에 겨운 바쁨이기에 감사히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미 지난 주에 인터넷 신청도 해 놔서 이번 화요일에는 인터넷 설치기사가 온다. 이틀만 더 옆집 아저씨 W-LAN으로 버티면 된다(참, 옆집 아저씨는 알리아저씨의 Bekannter인데 또 말하자면 길지만 어쨌든 좋은 분이다. 아주 흔쾌히 일주일간의 와이파이 공유를 허락해줬다). 우리는 이사를 하면서 이케아를 일주일 사이에 네 번을 다녀왔고, 바우하우스에 두 번 다녀왔으며 전동드라이버를 갖추는 철저함까지 구비했다. 알리아저씨는 자가용으로 우리 이사를 도와주러 내가 살던 동네까지 와주었고 덕분에 나는 내 방에 있던 가구들을 쉽게 옮길 수 있었다. 책꽂이와 침대는 정말 옮길 가망이 없어 슬퍼하던 차였는데. 여러 모로 고마운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계약 종료를 하게 되는 그 날까지 영원히 nett한 분으로 기억에 남아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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