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집을 구하는 기나긴 시간에 대한 글, 두번째
제시간에 맞춰 오는 대중교통을 기대하지 않게 되며 삶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게 독일에서 지내면서이다. 어언 1년차, 참 한결같게도 필요할 땐 늦게 오고 필요 없을 땐 시간을 잘 맞춰서 온다. 그 집을 보러 가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늦게 온 트램에 한 번 갈아타는 시간, 걸어가는 시간까지 합치니 15분 정도를 늦어버린 것이다. 원래 계획은 10분 일찍 도착하는 거였다. 망했구만, 하고 친구랑 부랴부랴 조금 늦는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건물로 향했다. 독일의 흔한 5층짜리 집 건물이 아닌, 우리나라로 치면 아파트형 건물이었다. 도착했다고 전화를 하자 아저씨가 2층 - 우리나라식으로는 3층 - 창문에서 몸을 쑥 내밀고 반갑게 인사하며 문을 열어줬다. 지금까지 만났던 부동산 업자들은 거의 깐깐하고 불친절했으며 간혹 정말 싸가지 없게 구는 경우도 있었는데 의외의 친절함이었다. 무려 지각까지 했는데. 들어가자마자 늦어서 죄송하다 하고 집 전체를 둘러보았다.
사실 나는 집 현관을 열고 들어섬과 동시에 진한 고양이의 냄새를 맡은 터였다. 한국에 있을 때 고영님을 모시고 살았던 전적이 있어서 고양이 화장실을 3개월쯤 안 치우면 이런 이상꼬리한 냄새가 날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절대 3개월 동안이나 안 치워본 적은 없다. 아무튼, 현관문을 닫자 뒤쪽으로 캣타워가 보여서 나의 추측은 확신이 되었으나 고양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서 내가 모시는 고영님처럼 낯을 가려 어디론가 숨어버렸구나 싶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에 띠며 악수를 청한 부동산 아저씨는 부엌이 여기고 화장실이 여기고 저기가 잠자는 방입니다 하면서 여기저기 설명을 해 주었다. 여태 방문을 하면 거의 빈 집이었는데 이 경우는 특이하게도 집주인이 아직 나가지 않은 상황에서 방문을 잡고 계약을 하려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보았던 집들과는 구조적으로도 장점이 딱히 보이지 않는데다 지각까지 한 마당에 연락도 안 올 것 같다고 생각을 한 나는 대략적 모습만 머릿속에 넣어두고 구경을 마쳤다. 집을 보던 당시가 10월 초였는데 이사 날짜가 12월인 것도 다소 멀게 느껴졌고.
아저씨한테 이런저런 설명을 듣는데 문득 시선이 발치로 향했다. 테이블 밑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는 고양이를 그제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 팔자도 좋고 성격도 좋다. 우리 고영이였으면 제일 높은 곳에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낯선 침입자가 나갈 때까지 감시하고 있었을 거다. 잠을 다 잔 건지 기지개를 켜면서 나온 고양이는 열심히 설명중인 부동산 아저씨의 다리에 몸을 부비며 영역표시..를 하고 유유히 쇼파로 올라가 앉아 우리를 지켜봤다. 참 나.
설명을 다 듣고 친구랑 나오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냥 그랬어- 라고 하는데, 친구 H는 그 집이 마음에 든다는 거다. 아저씨가 주말 동안 생각해보고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에(그 날이 토요일이었다) 메일로 의사를 알려달라 했으니 주말에 잘 생각해보자고 했다. 이전에 방문했던 집들에도 서류를 넘긴 상황이라 그 집들에 대한 확답도 받아야 해서 알겠다고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 서류제출을 했던 집들은 (또) 다 퇴짜를 맞았고, 화요일 저녁에 우리는 이 아저씨에게 입주하고 싶다는 뜻을 메일로 전해보자는 결론에 이른다.
지각해서 첫인상도 별로일 것 같고, 학생인데다 또 외국인이라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으나, 웬걸, 두어 시간 만에 답장이 와서 필요한 서류에 대해 알려준 아저씨는 우리의 서류를 집주인이 검토하게 될 것이고 그 주 안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부분적으로나마 긍정적인 편지를 받은 건 정말 처음이었던 우리는 1%까지만 기대해보기로 했다.
아저씨는 메일보다 전화통화를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첫 방문약속을 잡을 때도 전화로 연결을 시도했다가 음성메시지를 남겨놓은 걸 보니 일관성 있게 전화를 선호한다. 독일인과 하는 통화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던 나에게는 강제성을 띤 극복기인 셈이다.
필요로 하는 우리 개인정보를 채운 서류를 보내고 이틀인가 사흘 뒤, 아저씨는 집주인이 우리에게 집을 빌려주고 싶어한다는 의사를 밝혔음을 전해 왔다. 세상에.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학생이므로 부모님의 월세 관련 보증 내역이 필요하고 그걸 토대로 최종선택을 하게 될 거라는 말이 돌아왔다. 통화 음질로 빠르고 장황한 독일어 설명을 들으려니 귀를 두개 정도 더 달아야 할 것 같았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을 두 번 세 번 묻고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재차 확인한 뒤에야 통화를 끝냈고, 나는 내가 독일어로 양식을 채워 PDF로 만든 Bürgschaft(보증) 포맷을 아빠 메일로 보냈다. 엄마랑 아빠 각자 이름과 서명을 해서 사진으로 찍어 내게 보낸 걸 다시 PDF로 따서 아저씨에게 보내기까지 이틀이 걸렸다. 친구는 하루가 더 걸려서 결과적으로는 사흘.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보증인들이 독일 외(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독일 법이 효력을 발휘할 수 없으므로 이 보증서는 무효라는 확인이었다. 아저씨에게 우리가 보낸 계좌의 잔고 내역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돈이 충분한 걸 알지 않느냐고 어필해 보았으나 들을 수 있는 건 이 집의 주인이 거대한 임대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모든 걸 법적으로만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답뿐이었다. Privat(개인적)한 상황이면 자기가 어떻게든 설득을 시키거나 할 텐데, 아예 그 가능성 자체가 없다길래 내가 어떤 대안이 있는지를 물었다. 첫 번째, 독일인의 재정보증, 그리고 두 번째, 우리가 제출한 내역이 증명된다는 독일 행정기관의 도장. 이게 다였다. 개인적인 내용이라 자세한 걸 일일이 쓸 수는 없지만, 아무튼 친구 H가 고생을 좀 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어느 행정기관에서 어떤 류의 확인 도장을 받아야 하는지 머리를 굴리다가 H의 지인 중에 독일인이 계셔서 그 분께 부탁드렸고 흔쾌히 승낙해주셨다. 결론은, 그 보증서는 통했다. 뭐 이런 내용을 전화로 확실히 주고받다 보니 요즘 나의 전화 독일어(?)는 단기간에 다소 성장한 추세이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외로이 집으로 가던 버스에서 아저씨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할로? 잘 지냈냐는 인사와 함께 아저씨는 좋은 소식이 있다며 말문을 텄다. "Der Eigentümer möchte Ihnen die Wohnung vergeben. Möchten Sie diese Wohnung haben?" 집주인이 집을 넘기고 싶어하는데 받을래? 하는 전화를 받았을 때 3개월간의 마라톤이 끝나가는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났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JA! 하고 대답하자 계약서와 따로 작성하고 사인해야 하는 서류들을 이메일로 보낼 테니 꼼꼼히 보고 의문점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한 아저씨는 우리의 이름과 우리가 살 집의 집주소가 기재된 계약서(Vertrag)를 이메일로 보내줬다. 모두 확인하고 우리가 오케이를 하면 우편으로 보내줄 것이고, 그럼 정식 계약이 성사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서명 직전 단계다. 집의 상태를 다시 점검하고 큰 하자가 있으면 입주 전 보수신청을 해야 해서 마지막으로 집을 보고 그 날 계약서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세부적인 하자, 그러니까 전 세입자의 흔적들이어서 우리가 책임질 필요가 없는 사항들은 계약 오픈 당일에 열쇠를 받으며 프로토콜을 세세히 작성하게 될 것이다. 삶, 삶, 삶 (3)은 이사가 확정될 때 올라올 예정이다.
난이도 별 다섯 개 중 열 개. 물론 집을 구하는 본인이 경제적으로 넉넉하면 조금 덜 힘들 수 있다. 나는 부족하게는 지내지 않지만 그렇다고 여유롭게 지낼 형편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산을 잡을 때도 집에 이만큼을 더 투자하면 다른 생활비에서 저만큼을 더 빼야 했다. 위치와 가격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건 초반에 아주 포기했었다. 현재 내가 지내는 도시는 집값이 매년 솟구치고 있는 중이어서 올 해 못 찾으면 내년에 더 힘들고, 내후년에 더더더 힘들고... 그럴 것 같다. 여하튼 집 구하기 진짜 힘들다. 외국인 이름이면 아예 거르고 보는 부동산이나 개인 임대업자들이 전혀 없을 거라고 장담도 못 하겠다. 인터넷에 보면 일주일만에 집찾기, 하루만에 집 계약하기 등등등 멋진 경험들이 많다. 하지만 나에게 그렇게 멋지고 기적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많은 분들에게도 일어나기 다소 힘든 케이스이지 않을까, 싶다.
예산과 시기
우선 집을 구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차일피일 미루기보다는 확실히 예산과 시기를 고정해두자. 이건 개인의 기준에 따르기 때문에 절대적인 수치를 제시하기는 힘들겠지만 아무튼 확실한 계획이 필요한 부분이다. 한달 내외 정도의 여유는 괜찮지만 뭐~ 내년쯤에~ 가을쯤에~ 이러다가는 가을쯤에야 겨우 집찾기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집을 구하기로 마음먹고 예산을 잡는다면, 가령 한 달 밤미테 400유로를 투자하겠어! (사실 대도시 1인실을 밤미테 400유로로 찾았다 하면 주변 사람들의 감탄어린 말들을 들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하면 칼트미테 350 - 400 사이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밤미테로 합쳐지면 500유로 정도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그 스펙트럼 내에서 100~150유로 차이로 삶의 질이 아예 달라지는 다른 옵션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지하실이 제공된다던가, 대중교통 접근성이라던가, 부엌의 설치 유무 - 다들 알겠지만 독일은 부엌을 뜯어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새로 설치하려면 최소 1000유로는 깨지니까... - 와 냉장고/세탁기 포함 여부, 그리고 중앙난방 시스템인지 전기난방 시스템인지 - 전기난방(Elektroheizung)일 경우 전기값이 한국처럼 몇 만원에서 끝날거라는 생각을 네버! 하면 안 된다고 한다 - , 온수값은 난방비와 순간온수기 중 어디에 포함되는지 등등등. 그게 별로 매력적이지 않으면 100유로 더 싼 집을 고르면 되는 거다. 100유로 차이인데 집이 시내에 훨씬 가깝다면 100유로를 더 내도 괜찮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네벤코스텐은 잘 아껴쓰면 아주 조금 돌려받을 가능성도 있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처음에 협상했던 가격에서 150유로 정도를 더 올려서 찾았었다. 물론 두 사람이어서 부담이 1/2이 되기에 가능했던 큰 맘 먹기였을 수도 있다.
필수조건 정리 (ex. 대중교통, 마트...)
대중교통과 마트는 둘 중 하나는 가깝도록 하자는 것도 우리의 필수 조건이었다. 마트는 생필품 사러 정말 자주 드나들어야 하니 집 주변에 있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친구 중 한 명이 대형마트 바로 위층에 사는데 그냥 뭔가 필요하면 내려가서 사 오면 되는 게 그렇게 매력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대중교통이라도 만약 가까우면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내려서 바로 집에 올 수 있으니까 물 여섯 통쯤을 사들고 오는 날을 대비해서라도
이 조건을 잘 맞추자고 다짐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구한 집은 집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고 그 건너편에는 우반이 있으며 걸어서 5-7분 거리에 마트가 있다. 퍼펙트. (내가 이 집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할 때 이걸로 친구가 나를 그렇게 설득했다...자세한 설득 내용은 곧 아래에...)
부동산과 개인임대
부동산을 끼고 구하는 건 복비가 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법이 개정되어 집주인의 요청으로 부동산이 인터넷 사이트에 매물을 올린 것을 보고 소비자가 연락하는 건 복비가 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부동산에 방문해 집을 요청하는 경우에는 복비(Provision)가 들 수 있음을 유념해두자. von Privat이라고 개인이 올리는 집들도 좋은 경우가 많았으나, 나 개인적으로는 개인정보유출이 마음에 걸려 개인적인 임대 차원에 내 신상을 기입한 Selbstauskunft를 보낼 때마다 조금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인터넷에 통용되는 포맷에는 그저 집을 보고 난 뒤의 최초접촉 시에는 요구하지도, 요구될 필요도 없는 정보들도 들어가 있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하는 단계라면 말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예를 들어 주거래은행, 현재 사는 집의 주소(이건 정식 계약 시에는 필요하다), 현재 세를 주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 외국인이라면 여권번호 등등이 있다. 나는 이걸 일일이 다 줘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안다 해도 그저 나에 대해 알려주는 단계에서 이런 너무나 사적인 정보가 넘어가는 걸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포맷을 직접 만들었고 그곳엔 내 정보가 자세히 들어가기는 하지만 여권번호, 신분증 관련 정보, 은행 등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이 포맷도 굉장히 잘 통했고. 최종계약 할 때는 내 정확한 주소와 연락처, 그리고 신분증이 필요하긴 하니 참고해 두자.
부동산의 장점은 일처리가 어쨌든 모두 법적이고 전문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지며 그 집의 관리도 부동산이 한다는 것. 개인의 장점은 융통성이 어느정도 발휘된다는 점 정도로 정리가 가능하겠다. 다만 개인임대를 겪어본 바 한 번 계약 직전에 단순변심으로 퇴짜를 맞은 경험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그리 좋게 여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케바케이니 좋은 개인임대업자를 만날 수도 있다! 부동산의 경우 부동산업자가 재수없게 굴 수도 있으니까. 한번은 집구경을 갔더니 이 월세는 너네가 네벤잡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감당할 게 아니야! 이 큰 돈이 안 보이니? 라고 엄청 크게 무안을 줘서 엄청 화났던 적도 있었다. 네벤잡도 가지고 있고 부모님 보증도 있다고 한 거지 네벤잡으로 돈 낸다 한게 아니야 이 아줌마야, 하고 한국어로 재수없다고 한 마디 하고 나왔다.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면 외국어로 기분나쁘게 하는 게 인지상정(이라고 하고 소심한 복수라고 한다)... 짜증나서 서류도 안 보냈다. 월세도 비싸긴 했는데 또 저렇게 쪽 줄 것처럼 비싼 것도 아니었다. 생각하니 또 짜증나네... 아무튼 서러운 일이 이거 말고도 한두개가 아니었지만, 다 장단점이 있다.
집 방문 Besichtigung
방문 약속이 잡히면 옷을 최대한 깔끔하게 입고 가는 게 기본이다. 정장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말쑥하게 하고 가는 게 성공률이 높을 것이다. 대충 입고 허름하게 보이면 첫인상에서 밀릴 수 있다는 게 여러 사람들의 조언이다. 나는 학교 마치고 부랴부랴 꽃단장(?) 해서 풀메이크업 하고 집을 보러가곤 했다. 가서는 집이 마음에 든다는 것을 최대한 어필하고 예의바르게 설명을 듣는다. 궁금한 건 다른 사람들이 물어볼 때 같이 들어보고 그래도 뭔가 궁금하면 따로 물어봐도 좋다. 나는 성격상 궁금한 건 많은데 나서서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그 때마다 독일인들이 유려한 모국어로 대신 비슷한 질문들을 물어봐주니까 경청하면 된다. 하하. 하지만 계약 시에는 이것저것 꼼꼼히 물어보고 내 표현대로 표현해서 그 말이 맞는지 되묻는 것도 필요하다, 명심하자!
방문약속을 요청하는 이메일을 쓸 때 나는 내가 어떤 서류를 제출하여 나의 상태를 증명할 수 있는지도 목록을 작성했는데, 그 서류들을 방문약속 시에 일일이 다 출력해서 챙겨갔다. 가서 부동산 업자가 정보보호를 이유로 pdf를 달라하면 메일로 보내주면 되고, 아니라면 그걸 거기서 직접 제출하고 오면 된다. 경험해보니 후자를 좋아하는 경우도 있었고, 아니면 부동산마다 자신들 고유의 포맷이 있어서 그걸 따로 채워 pdf로 보내라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도 준비해가서 득이 되면 될 것이니 몇 장 출력하는 거 아까워말고 꼭 꼼꼼히 챙겨다니자.
아참, 진짜 중요한 건데, 나는 새로운 집을 하나 보러 갈 때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그 집을 계약하고 이사 들어가는 사람의 심정으로 인테리어고 뭐고 다 생각해버리는 타입이었다. 주변에 같이 집 보러온 잠재적 라이벌들 절대다수는 보이지도 않는다. 왠지 내 집 같고..막.. 휴. 결론은 다 거절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매번 그러다보니 기대치가 500%인 만큼 거절 의사를 받았을 때 실망감도 너무 컸다. 방문약속을 갈 때는 집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장단점을 보고 딱 거기서 그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지난 몇개월간 H와 내 모토는 '일희일비하지 말자'였다. 하하.
하면 된다 그러나 언제 될 지는 모른다
집을 구하는 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포기해야 하거나 감당해야 할 문제의 우선순위에 의해 그것이 쉬워지느냐 복잡해지느냐의 차이이다. 저렴한 월세를 포기하면 당연히 좋은 곳에 위치한 집을 좋은 시기와 상태로 넘겨받을 수 있다. 빵빵한 난방을 포기하면 전기 하이쭝이 있는 집도 살만할 것이다. 대중교통을 포기하고 자전거나 뚜벅이를 선택해도 한결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 개개인에게 각자 다 포기할 수 있는 구석과 없는 요소가 있다. 나는 대중교통 못잃어, 안전 못잃어 파였다. 친구는 대중교통은 잃어도 안전은 못잃어 파였고. 그래서 갈등요소가 적었다. 우리는 현재 내는 월세에서 100~150유로씩정도만 더 내면 되는 집으로 찾았다. 둘 다 나는 공동화장실/공동욕실/공동주방의 방 한칸 운터미테, H는 공동샤워실/화장실/부엌의 방 한칸짜리 기숙사에서 집다운 집으로 옮기는 것이어서 불만은 없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서 협상은 쉬웠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의 제대로 영역이 나누어진 방을 포기했다. 안전한 동네에 방이 딱딱딱 비슷한 크기로 나누어진 집은 애초에 잘 나오지도 않았고, 나온대도 경쟁률이 높았고, 가격 또한 비쌌다. 집 구역나누기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 추가하겠다. 아무튼 포기하는 게 생길수록 현실성은 높아진다는 점.
마인드 컨트롤
수십 통의 메일을 몇 번씩 보내도 답장은 오지도 않고, 와도 부정적인 답장이고,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당하고 또 새롭게 메일을 보내는 생활을 하다 보면 긍정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피곤하고 다 때려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해지는 게 순식간이다. 언제 끝난다고 확언할 수 없는 전쟁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럴수록 아주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한 통의 이메일이라도 더 쓰고, 조금 더 여유있는 그 마음으로 어디까지 포기하고 어디가 꼭 필요한지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무조건 혼자 살아야 할지, 친구랑 같이 살기에 도전해 볼지 등등의 다른 길도 같이 감안해보는 것도. 겪어본 입장에서 마냥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말할 수 없어 아쉽기는 하다. 그러나 이렇게 몇 개월동안 어둠 속에 있다가 어느샌가 집 구하기에 성공할 수도 있다. 외국인으로 살아남는 게 맨몸으로 바위에 부딪히는 것만큼이나 괴롭고 우울하지만 나 같은 경우를 참고하여 '아, 이런 경우도 있기는 하구나! 완전 100% 불가능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작성했다.
H가 나를 설득했다고 앞에서 잠시 언급했다. 애초에 나는 집에 방이 1개인 구조도, 한명은 탁 트인 거실에서 지내야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려 이 집을 넘기자고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H는 내가 그 방을 쓰라고 그랬다. 방이 조금 좁지만 개인공간으로서 '방'의 역할을 하니 내가 거기서 살고, 대신 자기는 넓은 거실방을 쓰지만 탁 트여 있고 부엌과 연결되어있으니 월세는 똑같이 반반 내자고. 작은 방에 살면 덜 내는 게 맞으나 공공영역을 개인영역으로 기꺼이 쓰겠으니 반반을 하자는 딜이었다. 오? 괜찮은데 해서 일단 오케이 했다. 그러고 내 방이 좁은 것 같으면 내 책상을 거실에 빼 놔도 된다고까지 했다. 지금 쓰면서 곱씹어보니 나를 살살 잘 꼬드긴 것 같다. 하하.
이 집은 세탁기도 설치할 수 있는 집이라고 했다면서 세탁기를 강조했다. 그런데 독일 사는 분들 아시겠지만 세탁기 진짜 중요한 문제다. 이것도 오케이를 했다. 그리고 부엌이 설치되어 있고 심지어 깨끗한 상태임을 강조했다. 독일에서는 부엌이 있고 없고가 꽤 중요하다. 새로 설치하려면 1000유로는 그냥 깨질 거라고 날 설득했다. 오호라? 여기에도 오케이 했다. 이 집에는 인터넷이 기본으로 제공된다고 했다. 새로 설치하려면 머리 아프다고 했다. 이건 잘 아는 문제였다. 또 오케이 했다. 어느새 나는 오케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화장실에는 샤워 커튼형이 아니라 샤워 부스가 있다고 했다. 관리하기 더 좋을 거라고 했다. 맞는 말이라 오케이를 했다. 바닥도 카펫이 아닌 코팅된 바닥이라 청소하기 좋다고 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조금만 가면 페니가 있고 네토도 있다고 했다. 마트가 가까운 건 정말 좋은 일이지, 하고 동의했다. 또, 집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고 시내로 곧장 연결되는 우반이 다녀서 좋다고 했다. 이 점은 나도 좋다고 생각하는 차였다. 그리고 버스 노선도를 알아본 결과 여기서 버스를 타면 우리 학교까지 10분이면 간다고 했다. 세상에... 그렇게 설득은 끝났다.
나는 지금 이제나 저제나 계약을 끝마치고 이사갈 날을 생각하며 인테리어를 마음 놓고 고민하는 중이다.
마지막 관문인 서명 후기와 지금 사는 집의 퀸디궁, 그리고 이사 후기를 들고 찾아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삶을 위한, 삶을 영위할 곳을 찾는, 삶
마지막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