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은 비효율에서 온다면서 왜 경력은..?
이전 글에서 UXer는 사용자를 위해 더 '좋은(?)' 경험을 디자인해 내는 자여야 하지만 그건 어찌 보면 기본기일 뿐, 인하우스 프로페셔널 UXer의 진짜 가치는 그것을 어떻게 현실에 구현해 내는지 '집행자'의 면모에 달려 있다고 이야기했다. 따라서 내가 정의하는 물경력 UXer란, 연차 대비 기대되는 '집행자'의 역량이 부족한 상태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집행 역할 자체가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다면? 그냥 물경력을 받아들이란 소리일까? '집행자' 역량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충분한 공감이 어려운 이들 또한 많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이 집행이라는 것이 생초보나 주니어에게는 와닿기 힘들다. 어차피 시키는 일만 하게 될 입장에게 무슨 집행이란 말인가 싶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타이틀은 그럴싸한 프로젝트에 가담했어도 도무지 이를 포트폴리오에 어떻게 녹일지 막막하다. '집행자'의 중요성에 대해 몰라서 그런 게 아니기에 더욱더 답답할 노릇이다.
생각이 이어지다 보면, 결국 그러한 집행을 잘하려면 역시나 아는 지식도 많아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렇다. 때문에 이전 글에서 '기본기'라 퉁친 표현부터가 초심자를 배려하지 못한 무책임한 말처럼 들렸을 수도 있겠다. 결국 '집행자'의 역량이란, 아무리 봐도 '기본기+α'의 어떤 지식이나 도구 활용 능력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좀처럼 떠나질 않기 때문이다.
이제 막 입문해서 뭐부터 어찌할 바를 잘 모르겠는 형국에선, 새로운 방법론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읽어봄직한 아티클과 책 추천 등을 해주는 게 훨씬 더 포근하고 확실한 포만감으로 다가올 것이다. 특히 '꿀팁'이라며 읽기 좋게 몇 가지로 간추려 포장된 스낵형 정보는 말 그대로 꿀맛이다. 그런데 그런 소개도 일절 없이 그저 좋은 말만 늘어놓는 이 모든 이야기란, 어느 정도 경력을 가진 이의 그저 배부른 소리처럼만 들릴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이 '집행자' 역량을 마주할 일부 시니어들 역시 마음이 영 편친 않을 것이다. 이래저래 틀린 말은 아닌데 왠지 달갑지가 않다. 왜냐하면 십수 년을 예를 들어, UX 컨설턴트로 임해온 입장에서는 '집행자' 같기도 '집행자'가 아닌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곱씹다 보면 혹시 내게도 물경력이라 말하고 싶은 것인가 하는 의구심에 화가 날 수도 있겠다. 불편함은 곧 잘못된 의견이란 반증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혹은 B2B 관련 업무를 해온 탓에 프로젝트의 중심축을 내 손에 아예 쥘 수가 없었던 경우, 모든 시간은 다 물거품 같고 결국 물경력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는 주니어든 시니어든 막론하고 벌어질 수 있다. 에이전시 혹은 웹 관련 대행 업무를 오래 하다 보면 분명히 이러한 생각을 많이 가질 것이고, 만나본 이들 역시 실제로 그랬다.
위에서 적은 대부분의 상황들은 사실 외부요인이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러니까 내 탓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 나는 물경력으로 귀결되는구나...' 더욱 비참하게만 다가올 것이다. 과연 이게 엔딩으로 그냥 끝일까?
하지만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보자. 물경력은 왜 될까? 물경력이 되게끔 만드는 위의 외부요인들의 특징은 이직이나 인사이동 등 시스템이나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역설적으로 바꿔볼 여지도 있는 것들이다. 즉, 가변적 속성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궁리도 하고 질문도 하곤 했을 것이다.
근데 이 외부요인이라는 현실이 참 감당하기 벅차고 쉽지 않은 대상이다. 이직을 하려면 전향을 해야 하는데, 기존 경력이나 연봉을 까먹어야 할 수도 있고 그 대가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렵사리 성공하거나 많이들 포기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멘토링을 하다 보면 그 접점을 찾아주고 대안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업이다. 그래도 생각지도 못한 점을 건드려주면 도움을 받는 것 같아서 다행인데,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 한 가지 내게 남아 있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내부 요인을 다루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외부요인을 다루는 것보다 어쩌면 훨씬 더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까다롭지만 매우 중요하다.
물경력이란 비만과 흡사하다. 비만이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는 하나, 꼭 모든 사람이 비만이 아니어야만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마찬가지로 물경력도 어떤 걱정되는 포인트 때문에 지양하고 싶겠지만, 어쩌다 보니 물경력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커리어를 계속 이어가면 안 되는 것 또한 아니다. 무조건적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근데 왜들 경계를 하고 걱정을 해서 관련된 질문을 계속 해올까?
내 대답은 잘못된 비교에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항상 더 나은 조건과 비교를 하게 되면 내가 가진 패가 후져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작 꼼꼼하게 따져봐야 할 비교 대상은 따로 있다. 바로 '과거의 나' 자신이다.
나는 '물경력'이라는 단어의 조어법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무가치하다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물'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인 것일 텐데, 과연 그 모든 시간과 노력이 진짜 물처럼 무의미하기만 할까?
만화 드래곤볼에는 카린의 '초성수'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손오공은 이 초성수를 마시고 더 강해지기 위해 높디높은 카린탑에 어렵게 올라 카린과 오랜 힘겨루기를 한다. 그 과정에서 탑 아래로 떨궈져 다시 올라가는 등 우여곡절 끝에 카린으로부터 초성수를 빼앗아 내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이윽고 마셔본 초성수는 그냥 '물'이었다. 알고 봤더니, 초성수라는 어떤 신묘한 약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빼앗기 위한 과정에서 벌어진 '수련' 그 자체가 바로 초성수의 정체였던 것이다.
물경력이라 여겼던 그 경력이 만들어지는 동안 과연 나는 무슨 수련을 할 수 있었을까? 왜 회사는 경력직을 더 선호할까? 물경력이라고 생각했다면 누구(면접관)를 기준 삼아 그렇게 생각한 것인가? 그리고 그 사이 '과거의 나'와 비교해서 정말로 나는 성장한 게 전무하고 퇴보했는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단 의미다. 어쩌면 물경력의 실체는 내가 만든 환상일 수도 있다.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는 일이 있는 반면, 너무 힘든데 어떻게 해서든 해내고 싶은 일도 있는 법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밤을 새기까지도 한다. 물론 대부분 이런 류의 일들은 오락성에 기반하거나 극단적인 나의 어떤 근성을 자극하는 즉, 업무가 아닐 확률이 높다. 그렇지만 나 자신이 이런 경험을 해보았다면 잘 생각해 볼 일이다. 물경력이라는 단어가 준 보이지 않는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선물 따위가 있을...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한 번 잘 생각해 보자. 그래야 진짜 물경력을 가지고서도 전향에 성공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냥 한 번 해보자는 것이 아닌 이는 고민하는 여러분 생존의 문제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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