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많은 직장암 3기 환자 가족의 입원일기
지난주 금요일 새벽, 간병 중 갑작스러운 오환이 찾아왔다. 6인실 병동이라, 실내 온도도 따뜻했고 이불도 두터웠지만 내 몸은 움츠러들기 바빴다. 그때 생각했다. "아, 내가 코로나에 걸렸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새벽 2시경, 다급한 마음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복도를 향했다. 간호사에게 "제가 OOO님 보호자인데요. 몸이 계속 떨리고 아픈 것 같아요. 저 혹시 코로나는 아니겠죠?" 간호사는 말했다. "아직 열이 37도 정도 미열인데, 응급실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좀 더 지켜봐요. 마스크 잘 쓰고 주무세요."
나는 타이레놀이라도 한 알 줄 수 있냐 물었지만, 여기서는 보호자 약은 따로 처방이 안된다며 응급실에 가야 한다고 했다. 아팠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내가 코로나에 걸리면, 아버지는 물론 이 방에 있는 환자들, 우리 층에 있는 환자, 보호자, 간병인, 간호사들까지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어서, 겉옷까지 꺼내 입고 옆 침대 이불까지 끌어다 초초한 마음을 웅켜쥐고 다시 잠에 들었다.
1시간도 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났다. 세상에 태어나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렇게 몸이 떨려본 건 정말 처음이었다. 보호자 침대가 너무 크게 울려 병실에 있던 환자들이 다 깰 지경이었다. 초초한 마음은 아픈 고통에 묻혀버렸고, 꿈을 꾸듯 몽롱한 상태로 복도를 나섰다. 다시 열을 쟀을 때, 내 열은 40도까지 솟아있었다. 간호사들이 5명이나 있었지만, 나는 이곳에서 환자가 아닌 보호자로 규정되고 있기 때문에 응급실도 내 발로 내가 찾아가야만 했다. 서러웠고, 자꾸만 눈물이 났다. "아, 진짜 내가 코로나면 어떡하나. 우리 아버지는 누가 간병을 하나..."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응급실 격리병실에 격리됐다. 해열제를 맞으며 잠에 들었고, 2시간 만에 검사 결과가 나오는 코로나 검사를 했다.
오전 6시, PCR 검사 결과는 양성이었다. 병원은 나의 확진 판정과 동시에 이런 것들을 물어왔다.
① 집에서 격리를 하셔야 하는데, 어떻게 이동하실 건지
: 보통은 방역 택시 이용, 혹은 가족 분들 중 데리러 오는 사람, 아니면 걸어가야 함(?)
나의 경우 방역 택시를 이용함.
② 병원비는 카드결제하실 건지, 아니면 계좌이체하실 건지
: 계좌이체를 한다고 하면, 계좌번호와 입금액을 문자로 보내줌.
세부 내역서는 간호사 통해서 약과 함께 전달해줌.
나의 경우, 다른 가족들도 아버지의 간병을 어떻게 할지 정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방역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정보가 하나도 없었던 터라, 응급실에 방역 택시 정보를 물어봤고 택시 기사님께 연락해 출발과 도착지를 말한 뒤 30분 만에 택시에 탑승했다. 내가 이용한 방역 택시는 공항까지 운영하는 콜밴 같았는데, 앞 좌석과 뒷좌석 가운데에는 방역을 위해 비닐 막음 처리가 되어 있었다. 경희의료원에서 집(구로구)까지 요금은 80,000원이었다. 택시비 치고는 부담되는 금액이었지만, 당시에는 날 집에 데려다준 것만으로도 참 고마웠다.
그렇게 불 한 번 켜지 않은 채, 죽 혹은 딸기-약-잠으로 꼬박 이틀을 보냈다. 나는 평소에 왕딸기를 참 좋아하는데, 밥은 안 들어가도 딸기는 들어가더라. 역시, 사람 입맛은 안 변하는구나 했다. 일어나기만 하면 세상이 빙빙 돌았다. 그런데 아프지 않으려고 물도 많이 마시고, 약도 빠짐없이 챙겨 먹었다. 혼자 있었는데도 병원에 있는 엄마/아빠, 그리고 언니네 가족들, 남자 친구, 친구들까지 많이 위로해주고 먹을 것도 많이 챙겨줘서 외롭진 않았다.
이 와중에 웃긴 일도 있었는데, 친한 오빠가 나랑 같은 날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 나보다 한 텀 늦게 증상이 올라오는 것 같아서, 동지애가 생겨 죽도 보내줬다. 오늘은 코로나 4일 차. 열이 떨어지지 않던 1~3일 차보다는 조금 살만 하다. 새로운 증상이 생겼다면, 마치 목에 칼을 베인 것처럼(너무 과격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목이 칼칼하다. 코도 너무 자주 막혀서, 숨 쉬는 게 고통스럽다. 다행히 내가 사는 자취방은 10층이라, 베란다가 있다. 베란다에서 좋아하는 과일과 따뜻한 코코아 한 잔 먹으면서, 얼른 회복해야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