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웃고 앉았나
결국은 또 '나 때문'이었다
나는 불특정 다수에게 나 자신이 오픈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선호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두려워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러므로 SNS도 하지 않으며, 카카오톡 프로필에도 사진을 올리지 않는다. 브런치에 글을 꼬박꼬박 발행했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스울지 모르지만 브런치의 글은 다른 문제이다.(서술하자면 길고 오늘 쓰고자 하는 주제와는 다르다.)
사진을 찍는 일을 싫어한다거나 자신이 오픈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 성향 등을 두고 ‘자존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는 이들도 있다. 내 자존감은 높은 편이 아니므로 그러한 분석 결과를 부정할 마음은 없으나, 그보다는 ‘개인의 취향’ 일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책 읽는 모임 선정도서인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청미래.)’를 읽고 있다. 책 안에서 ‘나’는 연인 클로이의 평상시 표정을 보고 그녀를 더 사랑하고 싶어 졌다고 이야기한다. 달달한 장면이지만 ‘내 평상시 표정은 무엇일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초중등학교 시절 내 졸업사진을 보면 사회에 반항 끼가 있어 보이는 아이가 있는데 그것이 나의 평상시(혹은 진짜) 표정일까? 종종 털어놓지만 내 초중등 시절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회에 불만이 있을 법도 하다. 평소 어머니는 집안에서 보이는 다듬지 않는 내 표정이나 자세, 습관 등을 자주 지적하시는데 어머니가 보는 상(像)이 곧 내 모습일까?
성인이 되고부터는 종종 과하다 싶게 웃고 있다. 편한 친구들과 있을 때는 정말 좋아서 웃지만 ‘때로는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서’ 혹은 ‘어떤 두려운 마음’ 때문에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근사근한 태도로 웃으며 상대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삶을 무너뜨린 사건들이 일어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방패막이라고 할까.
웃음을 방패로 삼는 태도는 옳지 않다. 얕은 생각으로는 웃음은 진실해야 하기 때문이며, 다른 목적을 덧붙이는 것은 웃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이다. 방패와 같은 웃음이 좋지 않은 더 큰 이유는 웃음이 방패가 되는 논리 안에는 ‘내가 나를 함부로 대하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입 밖으로 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이 내 안에서 꿈틀대는 것을 느낀다. 고통스러워서 해결되길 바랐지만 여러 이유로 억압해놓았던 일이고 감정들이다. 잠이 들기 전 혹은 감정이 다운되었을 때 그런 일들이 떠오를 때마다 습관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불행했던 일들을 내 책임으로 돌리는 태도는 결국 나를 갉아먹는다. 최근 친한 동기와 연애 이야기를 잠깐 했다. 지인을 소개해주겠다는 제안에 ‘그 사람이 너무 잘나서 만나기 부담스럽다.’는 대답을 했다. 얘기를 좀 더 나누면서 (지극히 세속적인)‘조건’이 차이가 나지만 결혼해서 잘 사는 사례가 나왔지만 나는 ‘그 사람은 외모가 출중하기 때문’이라고 되받아쳤다.
털어놓기에 비교적 가벼운 사례를 예로 들었지만 내 사고 과정을 따져보면 늘 내게 책임을 돌린다. 상대가 무례를 저지르거나 선을 넘었음에도 '내가 어딘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빌미를 준 것이라고 여겼다. 저 친구는 저런 것들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지만 나는 그러면 안 되는 이유는 결국 ‘내가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갖거나, 여러 일들에서 전후관계를 꼼꼼히 따져 자기 성찰을 하는 태도는 필요하다. 관계 안에서 반복되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보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보다 완성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와 같이 습관적, 자동적으로 내게 책임을 지우는 태도는 위험하다.
이런 것을 보면 글의 초반부에서 밝힌 ‘자신을 드러내기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자존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누군가의 추측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씁쓸한 마무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