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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기이택생 Mar 22. 2021

“맘 편히 울 곳이 있음 좋겠어.”

A와의 편의점 호로요이

“맘 편히 울 곳이 있음 좋겠어.”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 밤중에, A는 나를 편의점 앞으로 불러냈다. 그는 편의점 유리 벽 앞의 비가림막 밑에서 손을 밖으로 내밀고는, 떨어지는 빗물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감정은 마음이란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 같은 게 아닐까? 마음이 뭔가에 흔들려서 감정 이파리가 낙엽이 될 수도 있겠지만, 때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별다른 이유 없이 쌓이는 감정도 있는 거지. 마음이 버거워지지 않으려면 그런 ‘감정낙엽’이 쌓이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쓸어낼 줄 알아야 하는 거고.”


“그럼 맘 편히 우는 게 너만의 ‘낙엽 쓸기’ 같은 거야?”

“우는 건 좀 극단적인 방법이고, 보통은 가까운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면 쌓였던 감정들이 해소되는 것 같아. 사적인 대화는 생각과 감정의 표출이니까, 그럴 기회가 많을수록 해소되지 않은 감정이 적어지고 가슴에 쌓이지 않겠지. 문제는 한 사람이 한 번에 나눠 받아줄 수 있는 감정의 양에는 한계가 있고, 특히 슬픔에는 인색하다는 거야. 그러니 친한 친구에게라도 슬픔을 표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 타인의 슬픔은 온전히 공감되기보단 불쾌함이나 측은함을 함께 느끼게 할 가능성이 높아서, 한두 번은 위로와 격려로 받아주어도 지속적인 슬픔의 표현을 묵묵히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 그런 건 친구가 아니라 정신과 전문의에게 해야 할 일이지. SNS에 온통 행복한 사진들만 공유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일 테고.”

“사람들은 슬픔이란 감정을 나눠 받는 것에 인색해. SNS에 온통 행복한 사진들만 공유되는 이유도 그런 거지.”



“그래도 네 주변에는 네가 슬퍼하는 이유를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해 줄 수 있는 깊은 관계의 친구들도 있잖아. 내게도 슬픔을 마음껏 표출해도 돼.”

“우리는 첫 수업 시간에 옆자리에 앉았거나 하는 사소한 이유로 친구가 된, 손익을 따지지 않고 시작한 관계잖아. 그게 ‘어릴 때 만난 친구들이 평생 간다.’ 하는 거지. 사회인이 된 후에 맺게 되는 관계 중에 손익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몇이나 되겠어. 인간관계는 결국 개개의 필요에 의해 시장 논리에 따라 유지되니까, 많은 사람에게 선호되고 잘 팔리도록 다들 긍정의 가면을 쓰는 것 같아. 누군가의 본성이 다소 우울하거나 염세적이라도, 관계 시장에서는 감수성이 풍부하다거나 신중하다는 식으로 포장해야 하지. 그런데 슬픔을 잘못 표출하여 공감의 선을 넘는 순간, 열심히 만들어온 포장지가 벗겨지고 시장 논리에 의해 소외될 가능성이 충분하거든. 그래서 진정한 슬픔의 해소는 긍정의 가면을 벗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편한 친구 몇을 제외하면, 오히려 아직 가면을 쓰기 전인 낯선 사람에게 더 잘 되는 것 같아.”


“낯선 사람에게 슬픔을 털어놓는다고? 어색해서 얘깃거리를 전혀 못 꺼낼 것 같은데.”

“처음이 어렵지 사실 별거 아니더라. 슬픔에 너무 절여져서 기분이 땅에 처박히는 느낌이 들 때는 미친 척 아무에게나 말을 걸기도 했어.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시간 괜찮으시면 제 얘기 좀 들어주시겠어요?’ 하며 내 속내를 풀어놓거나, 몇 년은 연락 안 한 친구에게 갑자기 울며 전화하기도 했지. 어느 날엔 비를 맞으며 벤치에 가만히 앉아서 울고 있으니까, 누군가가 우산을 갔다 줬는데 그게 또 큰 위로가 됐어. 그치만 이런 우연도 한두 번이지, 내 힘듦을 표현할 사람을 찾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더라. 슬픔을 매번 누군가에게 나누며 해소하는 게 불가능하단 건 나도 아니까, '눈물방' 뭐 그런 거라도 있으면 좋겠어. 필요할 때 몰래 들어가서 맘 놓고 울며 슬픔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게 말이야.”


A에게 달콤한 무언가가 필요할 것 같아서, 잠시 편의점에 다녀왔다.

“나한테 슬픈 마음을 털어놓은 네 용기를 칭찬하기 위해 샀어. 같이 마시자, 나 일본 여행 갔을 때 마셔본 술인데 달고 맛있어.”

A는 캔맥주가 담긴 비닐봉지를 건네받으며 꽤나 길게 나를 안아주었다. 남자끼리 편의점 앞에서 포옹이라니 부끄러웠지만, 비가 적당히 가려줄 터라 괜찮겠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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