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을 파는 사람
5년 가까이 IT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IT 기획을 천직이라 여겼다. 그것도 그럴 게 IT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꽤나 계시적이었다.
한참 진로 고민을 할 고등학교 시절 아이폰이 세상에 나왔다. 영원할 것 같던 피처폰의 시대가 저물고 스마트폰의 시대가 도래했다. 앱스토어엔 매일 같이 새로운 앱이 출시되어 우리의 일상에 파고들었다.
19년 인생 중 처음으로 느껴보는 변화의 파고였다. 나도 파도에 올라타고 싶었고 자연스레 IT 업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 스마트폰을 만들든 그 안에 들어갈 앱을 만들든 다 재밌을 것 같았다.
산업 디자인과에 입학하기 위해 재수를 했고 - 결국 실패했지만 - 대학교 땐 IT 창업 동아리에 들어가 흥미를 이어갔다. 그 결과 IT 서비스 기획자 혹은 PM이라고 하는 길에 발을 들이게 됐다.
관심을 갖고 취직하기까지 10년 간 진로를 의심한 적이 없다. 취직은 곧 기반 공사의 마무리였고 커리어를 잘 쌓아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입사 초기 선배와 동료들을 보고 배우며 경험을 쌓았다. 보람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흥미가 떨어졌다.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마음속에 피어났다.
처음엔 직장 탓을 했다. 대기업 문화가 나와 맞지 않다고 여기고 몇 차례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고려한 적도 있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회사에 만족하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고민을 안고 IT 서비스 기획 북클럽을 시작했다. 각기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몇 차례 모임을 가지며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다른 곳에 가더라도 난 만족하지 못하겠구나.’
다른 회사가 별로라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친구들의 회사는 IT 기획자로서 커리어를 잘 쌓을 수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친구들도 탄탄하게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고.
모임에선 IT 기획 관련된 책을 읽으며 경험을 나눴다. 팀의 목표를 설정하는 방식, 데이터를 분석해 지표를 개선하는 방법.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기에 관심을 가지려 했지만 즐겁지 않았다. 수능 언어 지문 보듯 책을 읽었다.
다른 친구들은 재밌게 읽는데 왜 난 그렇지 않을까. 틈틈이 고민을 했고 우리는 ‘같은 기획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우리는 일의 시작 지점이 달랐다.
일반적인 IT 서비스 기획자의 일은 시장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에겐 사람들이 뭘 좋아하고 어디에 돈을 쓰는지가 중요했다. 내 기획은 내 안에서 출발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돈보단 내가 좋아하는 일인지가 중요했다.
돌아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작업은 모두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린 일이었다. 입사 전 진행한 자유 프로젝트들. 결과적으론 취직에 도움이 되었지만 진행할 땐 구직 신경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지난 10년 간 쌓아온 확신을 해체해 다시 살폈고 스스로를 예술가형 기획자라 정의 내렸다. 그러니 내가 겪고 있는 문제가 이해됐다.
나는 예술가형 기획자인데 사업가형 기획자의 방식대로 일을 하고 그들의 기준에 따라 스스로를 평가하니 일에 흥미가 떨어진 거였다. ‘기획’ 혹은 ‘기획자’라는 이름으로 묶인다고 한 덩어리라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회사가 아니라 나 자신이 원인이니 다른 곳으로 옮겨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직 준비를 하며 진을 뺄 필요가 없었다. 대신 예술가형 기획자로 먹고살 수 있는 법을 찾기로 했다.
예술가형 기획자로 살아남으려면 마음 가는 대로 만든 게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돈을 주고 사고 싶을 정도로. 다시 말해 자신의 취향을 팔 수 있어야 된다.
그렇다면 내 취향을 드러낼 상품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지난 10년 간 만들어 온 IT 서비스가 되어야 할까.
IT 서비스엔 마음이 가지 않았다. 앱/웹 프로덕트를 만드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결과물에 영혼이 담긴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IT 매체는 시대를 탄다는 인상이 강하다. 피처폰의 시대가 한순간에 저무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다. 지금 우리의 손을 떠나지 않는 스마트폰도 언젠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그릇에 취향을 담고 싶었다. 내게는 그게 글과 공간이었다. 둘은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 한 매체계의 고전(古典)이다. 글과 공간이라면 평생에 걸쳐 이어질 취향이 한 자리에서 아늑하게 세월을 머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두 매체에 어떻게 취향을 녹일 것인가. 답은 단순했다. 둘 다 좋아하니 글쓰기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면 됐다.
문제는 내가 공간 기획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도전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도 많고 돈도 적지 않게 들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마음이 갔다. 공간의 매체적 특성에 끌렸다. 공간만큼 한 사람의 취향을 오롯이 담아내는 매체가 있을까.
유튜브 자취방 콘텐츠를 보면 대부분 비슷한 모양의 방에 살지만 다들 개성이 넘친다. 친구를 자주 초대하는 사람은 원형 테이블이 집의 중심이다. 혼자 작업을 많이 하는 사람은 넓은 책상이 집의 중심이다.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들이는 가구와 그것들의 배치가 달라진다. 한정된 공간의 크기로 한 사람의 우선순위가 드러나고 취향 또한 고개를 내민다.
이런 장점을 놓치고 싶지 않아 공간 기획이라는 낯선 분야에 뛰어들기로 했다. 글쓰기와 공간을 한 데 녹여 내 취향을 드러낼 상품을 만들어 보자. 장기 프로젝트를 각오하며 의지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