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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Mar 02. 2024

매몰 비용

환경 조성하기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믿어 왔다. 그전까지는 어떤 앱이나 웹 서비스를 만들겠다고 다짐하면 웬만해서는 끝을 봤다.


이런 자신감이 출판전야를 시작할 때는 자취를 감췄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일이기에 도착지에 서 있는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 앞길이 까마득했다.


출판전야를 숙소로 만들고 싶어서 더 그랬다. 숙소를 만들려면 준비할 게 많았다.

어디다 숙소를 지어야 하나

서울은 너무 비싸니 근교로 나가야 하나

면허도 없는데 땅은 어떻게 보러 다니지

근데 어떤 땅에 숙소를 지을 수 있지

다 지으면 숙소 관리는 누가 하지


눈앞의 장벽이 너무 많고 높았다. 집을 지으면 10년은 늙는다던데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세 좋게 시작했지만 금세 지지부진해졌다. 하는 둥 마는 둥. 회사 일에 회의감을 느낄 때만 잠깐 들여다보게 됐다. 그렇게 진전 없이 1년이라는 시간을 유야무야 흘려보냈다.


연말이 되어 한 해를 돌아보며 특단의 조치를 내리기로 했다. 앞을 내다보면 답이 없다. 당장 내딛을 수 있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매몰되어야 한다.


두 가지 행동을 취했다. 첫 번째는 출판전야의 로고를 만드는 것. 두 번째는 오프라인 공간 기획/브랜딩 모임에 나가는 것. 모두 돈만 내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숨고에 출판전야 로고 외주를 맡기고 인사이터라는 모임 플랫폼에서 오프라인 공간 관련 모임을 신청했다. 총 60만 원이 들었다.


돈을 쓰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이걸 매몰비용의 오류라 하지만 어쩌겠나. 어찌 됐건 사람은 그 오류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니 그 점을 활용하기로 했다.


매몰되기 위해 쓴 비용의 효과는 좋았다. 진전 속도가 엄청 빨라지진 않았지만 바퀴에 녹이 슬지 않을 정도로는 나아가게 됐다.


로고가 나온 후 출판전야 인스타그램 채널을 만들었다. 출판전야를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용도였다. 채널을 만드니 의무감이 생겨서 전보다 출판전야에 대해 고민하는 횟수가 늘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게시글을 올리고자 노력했다.

출판전야 최초 로고

모임에서는 오프라인 공간에 관심이 많은 분들을 만났다. 호텔을 관리하는 분, 파티룸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분, 직접 호텔을 만들려고 하는 분까지. 한 달에 한 번 그들 곁에서 공간을 기획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동기부여가 됐다.


환경 조성을 하며 한 보 내디디니 자신감이 생겼다. 이렇게 차근차근 가다 보면 언젠가 출판전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득한 도착 지점이 아닌 발밑만 보고 걷기로 다짐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더 살폈고 한 기사에서 본 사례가 떠올랐다. 제품이 없는 상태에서 그럴듯한 웹사이트를 만들어 브랜딩을 하고 예비 고객을 모은 스타트업 이야기였다.


그들의 방식을 출판전야에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은 기본적인 웹 디자인과 개발은 할 수 있으니까.


출판전야를 소개하는 웹사이트를 만들기로 했고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출판전야를 준비하며 가장 수월하게 진행된 일이 아니었나 싶다. 진도가 술술 나가 즐거웠다.


웹사이트를 만들어 주위에 공유했고 다들 그럴듯하다는 말을 해 줬다.

출판전야 웹사이트

이 웹사이트에다 출판전야 관련 콘텐츠를 아카이빙하기로 했다. 출판전야가 완성되면 손님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온라인 채널로도 쓸 수 있었다.


IT 서비스 기획자로서의 경험을 써먹을 데가 있어 뿌듯했다. 공간 기획에 처음 도전하는 거라 원점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간 다져온 바탕이 출판전야를 만들 때 도움이 되리라.


공간 기획이든 IT 서비스 기획이든 모두 기획이니 교집합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체가 다를 뿐 둘 다 사용자의 경험을 설계하는 일이니까.


요새는 오프라인 경험이 온라인에서 시작되는 경우도 많다.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를 통해 장소를 발견하고 찾아가는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 경험을 한 줄기로 이으면 보다 매끄러운 경험을 선사할 수 있지 않을까.


‘공간’이나 ‘IT 서비스’라는 수식어에 얽매이지 않고 기획자의 관점에서 출판전야를 다루기로 했다. ZERO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할 수 있는 게 많아 보였고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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