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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Mar 09. 2024

준비물

출판전야의 철학

출판전야를 준비하며 다양한 장소를 탐방했다. 어떤 점이 이곳을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할까. 인상적인 장소에선 공통적으로 운영자의 철학이 드러났다. 블루도어북스, 책바, 경일옥 핏자리아와 같은 곳이 그랬다. 책장, 소품, 메뉴판 등 장소 곳곳에 운영자의 마음이 묻어 있었다.


이런 곳에는 손님이 방명록과 같은 형태로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 장소를 매개로 운영자와 손님이 소통한다.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면 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처럼 그곳은 손님에게 특별한 장소가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와 반대편에 있는 공간을 간 적도 있다. SNS에 공유하고 싶을 정도로 화려한 곳이었지만 운영자의 철학은 느껴지지 않았다. 있더라도 오픈에 맞춰 급조된 사상누각처럼 내실이 없었다.


그런 경우엔 운영자와 손님 간의 소통이 일어나지 않았고 공간이 특별해지기 어려워 보였다. 더 화려하고 유행에 부합하는 곳이 나타나면 잊히겠지.


북아현동에 위치한 상상헌에 다녀온 날이 기억에 남았다. 상상헌에선 북토크, 캔들 나이트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고 그 중심에 운영자인 안나가 있었다.


깊은 골목에 눈에 띄는 간판도 없이 숨어 있는 상상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자그마한 마당을 품은 고즈넉한 한옥이 보였다.


오래된 한옥이었지만 낡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옥 이곳저곳에서 안나의 손길이 느껴졌다. 세월을 진득하게 머금은 가구들이 한옥과 어우러졌다. 그중 책상과 의자는 버려졌다가 안나 덕에 상상헌에서 다시 쓰임을 찾은 아이들이었다.


상상헌을 둘러보다 안나와 캔들 나이트를 시작했다. 책상 위에 촛불을 켜놓고 대화하는 시간. 안나가 잘 이끌어 준 덕에 고민이 술술 나왔다. 주로 출판전야 이야기를 했고 안나에게 조언을 받았다.


안나는 상상헌이 물리적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이 있는 곳이 곧 상상헌이라고. 북아현동의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지만 괜찮은 이유였다. 결국 장소의 매력은 물리적 공간보다는 운영자에 달린 일이었다. 안나와 대화를 나눈 후 출판전야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나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어떤 마음을 갖고 출판전야를 운영하려는 걸까. 돌아보니 그냥 그런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두루뭉술한 마음뿐이었다.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한 철학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리 없었다.


출판전야의 철학을 다듬을 필요가 있었고 고독을 시작점으로 삼았다. 출판전야의 주요 키워드인 고독에 대해서만큼은 단단하고 날카로운 관점을 갖고 있어야 했다.


글은 혼자 써야 한다는 어렴풋한 생각만으론 부족하다. 고독의 뿌리까지 파고들자. 왜 우리는 글을 쓰기 위해 고독해져야 하는가. 고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고독과 관련된 책을 눈에 보이는 대로 사서 읽었다. 주위에선 내가 읽는 책의 표지를 보고는 혼자 있고 싶은 거냐 농담하기도 했다.


관심을 가지니 생각보다 고독을 다룬 책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버지니아 울프, 헤르만 헤세, 에밀리 디킨슨 등의 작가들이 고독에 대해 논하는 글을 읽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책, 자기만의 방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고독은 거실로 밀려난 여성이나 온 가족이 한 방에 살 수밖에 없는 빈자에겐 요원한 일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지켜보는데 진심을 담아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독의 필요를 이야기하는 신간도 꽤 있었다. 초연결 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고독이 결핍되었다. 고독의 이로움과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고독에 대한 작가들의 생각을 엮은 ALONE이라는 책에서 본 구절이 인상 깊었다.

현대인들은 예전보다 더 외로워졌으나 예전보다 혼자 있는 것에 덜 익숙하다.


물론 누군가는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고독이 뭐가 좋냐고 할 수도 있다. 이 말에서 정정하고 싶은 건 고독이 관계의 단절이라는 부분이다.


고독은 오히려 연대로 나아가는 길이다. 누군가와 깊게 소통하려면 자신과 대화하는 고독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짧은 작대기로는 연못의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다.


황현산 선생님 또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관계란 기억의 교환이다. 다른 사람에게 평범한 기억밖에는 만들어줄 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자신의 기억을 갖지 못하는 인간은 다른 사람의 기억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어떠한 이유로 고독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출판전야가 그들에게 마음껏 고독해질 수 있는 은신처가 되길 바랐다.


고독에 침잠하여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자연스레 글이 써지지 않을까. 고독과 쓰고 싶은 마음이 만나면 글이 나온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책 하나하나 완독할 때마다 뿌듯했다. 출판전야의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내가 쌓여 가고 있다는 감각. 내게 영감을 준 책들이 출판전야의 책장에 꽂혀 있을 것을 상상하니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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