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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Woo Lee Jul 06. 2024

작품

느슨한 연대

명창정궤(明窓淨几). 밝은 창이 비추는 깨끗한 책상이라는 의미다. <아무튼, 서재>라는 책에서 알게 되었는데 예로부터 선비들이 멋진 사랑방을 이를 때 사용한 성어라 한다.


명창정궤의 밝은 창에서 중요한 건 한지 문창호였다. 한지 문창호는 직사광선을 누그러뜨려 사랑방에 은은한 빛이 감돌게 했다.


이 점을 참고하여 출판전야를 만들 때는 한지 문창호를 꼭 넣고 싶었다. 데이데이와 이야기할 때에도 한지 문창호를 넣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창의 크기에 맞춰서 만들어야 하기에 기성 제품을 살 수는 없었다. 디자이너 분과 얘기를 했고 필요에 따라 걷을 수 있는 한지 블라인드를 주문 제작하기로 했다.


며칠 뒤 디자이너 분이 한 작가 님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내 주셨다. 한지와 패브릭을 재료로 작품을 만드시는 소미 작가 님이었다.


인스타그램에 멋진 작품이 많이 보였고 한지 블라인드도 다루시는 것으로 보였다. 카카오톡 채널을 통해 제작 상담도 받으셨다.


디자이너 분과 논의하여 소미 작가 님께 작품을 의뢰하기로 했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작품 의뢰였다. 출판전야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내가 직접 연락을 드렸다.


출판전야 소개로 대화가 시작되었고 현장 사진, 한지 블라인드 레퍼런스, 디자인 톤앤매너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다. 다행히 작가 님은 출판전야에 관심을 보이셨다.


대략적인 견적이 나왔는데 최종 결정은 작가 님의 작업실에서 샘플을 보고 내리기로 했다. 디자이너 분과 함께 개봉역에 있는 작가 님의 작업실로 갔다.


작업실까지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개봉역에 가는 데에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내린 후에도 마을버스를 타고 더 들어가야 했다.


저층 빌라가 많이 보이는 마을 앞에서 내렸다. 이런 주거 지역에 작업실이 있나라는 생각을 하며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마을 가장 안쪽으로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 때 한 단독 주택이 눈에 띄었다. 2층 주택인데 큰 창을 통해 작가 님의 작품이 보였다.

작가 님의 작업실

설레는 마음으로 작업실에 발을 들였다. 작가 님이 맞이해 주시며 작업실 1층을 소개해 주셨다. 작가 님의 한지, 패브릭 작품과 재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작업실 1층

나는 물론 디자이너 분도 감탄하며 작가 님의 설명을 들었다. 작가 님은 같은 작품을 두 번 만들지 않는다고 하셨다.


1층을 둘러본 후에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함께 작가 님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출판전야의 인테리어 시안도 살폈다.


이때부터 디자이너, 작가 님 간의 티키타카가 이어졌다. 출판전야에 어떤 색감과 재질의 재료가 어울릴지, 한지나 패브릭 중에 어떤 걸 재료로 할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대화를 지켜보며 문득 이 분들에게는 이게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젝트에 따라 새로운 인연을 맺으며 외연을 넓혀가는 일이.


실제로 작가 님은 여러 건축가와 협업을 해 오셨다. 원래는 순수 예술을 주로 했는데 건축가와 교류하며 작품 세계가 넓어졌다고 하셨다.


건축가 분들이 작가 님의 작품을 보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주셨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디벨롭하면 상업화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는 식으로.


그 결과 세상에 나온 게 우리가 의뢰할 한지 블라인드가 아닐까 싶었다. 작가 님의 한지 블라인드는 한옥 스테이에서 핵심 오브제 역할을 했다.


한지 블라인드를 거쳐 부드러워진 빛이 한옥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작가 님의 작품이 없다면 한지가 아닌 캔버스에 그린 동양화 느낌이 날 것 같았다.


낯선 세계가 맞닿아 서로의 지평을 넓혀 주는 게 흥미로웠다. 프로젝트가 달라져도 함께 일하는 사람이 크게 변하지 않는 인하우스 기획자였기에 더더욱.


언젠가 책에서 본 느슨한 연대라는 말이 떠올랐다. 산책하듯 서로의 세계를 둘러보며 재밌는 일을 찾을 수 있는 관계. 어딘가에 강하게 결속된 사람은 갖기 어려운 관계다.


책에서만 보던 느슨한 연대의 현장에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 출판전야를 계기로 한지 예술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됐다. 나뿐만 아니라 디자이너 분도 작가 님의 세계를 둘러보며 즐거워 하셨다.


출판전야의 블라인드는 안동의 전통 한지를 재료로 만들기로 했다. 한지 느낌이 나는 패브릭도 후보에 있었지만 출판전야는 글 쓰는 서재인 만큼 진짜 한지를 넣고 싶었다.


또 장인 분들이 제작한 한지로 무언가가 계속 만들어져야 그들의 전통도 이어질 수 있다는 작가 님의 말씀에도 공감이 갔다. 견적 가격이 뛰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봤다.


한지 블라인드의 디자인과 색감은 개성을 드러내기 보다는 출판전야에 은은하게 녹아들 수 있는 방향으로 잡았다. 가로 선이 하나만 들어간 간결한 격자 무늬, 은은하게 감도는 나무색이 그 자리에서 정해졌다.


마지막으로 한지 블라인드 우측 하단에 출판전야와 관련된 글귀를 서예로 넣으면 좋겠다는 작가 님의 제안이 있었다. 나와 디자이너 분이 생각하기에도 출판전야만을 위한 작품인 만큼 서명이 있으면 근사할 것 같았다.


글귀로는 바로 명창정궤가 떠올랐다. 마침 한자라 서예로 넣기도 좋아 보였다. 주변에 서예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찾아보겠다고 했다.

한지 블라인드 도안

논의가 마무리되고 작가 님의 작업 방식을 보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예술가의 작품이 태어나는 작업실을 볼 생각에 설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거대한 작업대였다. 내가 올라가서 대자로 누워도 남을 정도로 넓었다. 작업대 옆에는 천연 염색 재료로 보이는 콩이 사발 안에 담겨 있었다. 옆방으로 건너가면 건조 단계를 거치고 있는 작품들이 보였다.


작가 님은 작업대에서 한지를 재단하고 천연 염색을 한 뒤 건조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말씀해 주셨다. 건조에 필요한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서 작가 님께 빨리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실을 보니 한땀한땀 수작업으로 만들어질 출판전야의 한지 블라인드가 더 기대되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작가 님께 정식으로 작품 의뢰를 드렸다.


원래는 한지 블라인드만 생각했는데 작가 님의 안목으로 채워진 작업실을 보고 패브릭 쿠션도 의뢰하기로 했다. 작가 님은 작업실을 보고 작품 계약을 안 한 분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작가 님께 인사드리고 나오니 짧은 여행을 마친 느낌이었다. 작가 님의 세계에서 꽃가루를 잔뜩 묻혀 나왔다.


집에 돌아오며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많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지의 세계에서 계속 꽃가루를 묻혀오다 보면 내 세계에도 재밌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란 믿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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