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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javenture Jan 20. 2016

백수에서 '용사'로 : 극한의 알프스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그 다섯 번째 이야기


퇴사라는 '인생의 모험' 후 떠난 알프스 / Lac Blanc, Chamonix, Haute-Savoie, France (2015)


퇴사로 인해 2년간 나를 대표했던 'XX회사 XXX팀 직원 박용준'이라는 타이틀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냥 '박용준'이 되었다. 사실 엄청난 일이었다. 서른 해 남짓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는 늘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었고, 내 이름 앞에는 항상 이를 보여주는 수식어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학생' 박용준으로 시작해 '군인' 및 '복학생', 그리고 '네팔 봉사단원'과 '교환학생' 박용준을 거쳐, 최근까지 '직장인' 박용준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게 인생의 80% 이상을 어딘가에 소속되어 살아왔는데,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나니 이름 석자만 남았다. 짧지만 정말 깊게 몰입했던 직장생활이어서 그런지, 더 이상 거기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점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우선 '내가 백수가 되었다는 사실'부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백수(白手)', '손이 하얀 사람'이라니, '무직(無職)'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그래서 사회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소개를 해야 할 때, "지금 잠깐 쉬고 있어요(뭐, 백수는 아니에요)", 혹은 "이직 준비 중입니다(아니, 백수는 아니라니까요!)" 따위의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한 퇴사고 내가 선택한 길인데 나조차 그 결정에 떳떳하지 못한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퇴사 다음날, 어머니 심부름으로 동네 슈퍼마켓을 가다가 캔커피 하나 준다는 말에 무슨 설문조사에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직업을 묻는 질문에 나는 조금 과장되게 "전 백수예요!"라고 쾌활하게 말했고, 설문조사를 하시는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굉장히 어색하게 웃어주셨다.


대안 없이 감행한 퇴사였기에 막상 무엇을 할지 몰랐다. 학생은 공부를 하고 직장인은 일을 하는데, 백수는 뭘 해야 하는 거지? 평생 백수로 살 수는 없을 테니 다시 무언가 하긴 해야 했지만, 지칠 대로 지쳐있던 당시에는 거기에 대해 아예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좀 쉬고 싶었다. 그런데 뭘 하면서 쉬어야 할지는 막막했다. 야근과 업무 스트레스로 항상 피로에 찌든 채 몇 달 동안의 꿀맛 같은 휴식을 꿈꿨던 나인데, 막상 여유가 생기니 뭘 하며 쉬어야 할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은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긋지긋한 대도시 서울을 벗어나 어디론가 조용한 곳으로 떠나고 싶었고, 당장 갈 수 있을만한 곳은 바로 제주도였다. 다음날 아침, 2010년에 에베레스트 갈 때 썼던 대형 배낭을 오랜만에 꺼내 매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처음 방문하는 제주는 참 좋았다. 나는 한라산을 오르고 숲길을 걸었으며 바닷속을 헤엄쳤다. 해안가에서 혼자 캠핑을 하면서 고독을 즐기기도, 또는 저마다의 고민을 품은 다른 이들과 깊지도 얕지도 않은 대화를 나눴다.

'야생'과 '자연'이 그리웠던 나는, 제주에서 캠핑으로 '백수인생'을 열었다. / 제주도 우도(비양도)


4박 5일간의 일정 중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혼자 머물렀던 우도(비양도)의 비박터였다. 낮에는 새파란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밤에는 텐트 속에 앉아 캄캄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핸드폰 전원을 끄고 랜턴도 없이 파도 소리를 들었다. 아침에는 맨발로 이슬에 젖은 풀밭을 걸으며, 떠오르는 태양이 쏟아내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자유를 느끼며, 나는 내가 무언가를 지독하게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었다. 네팔 히말라야에서 만난 적 있는, 거대하고 아름다우면서 두려운 대자연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제주도에서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냈다. 그것은 바로, 산과 들과 물이 있는 '야생'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2015년 6월, 나는 퇴사한 지 일주일 만에 프랑스 알프스로 떠났다. 먼저 알프스를 가자고 제안했던 친구 SW와 함께였다. 저렴한 중국 항공사를 통해 날아간 스위스 제네바(Geneva)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도착한 곳은 바로 프랑스 샤모니몽블랑(Chamonix-Mont-Blanc). 서유럽 최고봉 몽블랑(Mont Blanc)(4,808m)과 가까운 프랑스 알피니즘(Alpinisme)의 근원지이자, 동계 스포츠의 성지로 유명한 도시다.

도망치듯 알프스로 온 나를 위로해 준 샤모니 / Chamonix-Mont-Blanc, Haute-Savoie, France (2015)


샤모니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캠핑장에 텐트를 쳐놓고서는 동화 같은 산악도시의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애귀뒤미디(Aiguille du Midi, 남쪽 봉우리)(3,842m)에 올랐고,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거대한 대자연 앞에 전율을 느꼈다. 다음 날에는 필요한 장비와 식량 준비를 마친 후, 샤모니를 둘러싼 몽블랑 산군(Massif du Mont-Blanc) 협곡을 따라 나흘 간 백패킹을 했다. 이후 다시 샤모니에 돌아와 프랑스 최대의 빙하인 메르드글라스(Mer de Glace, 얼음 바다)를 걸었고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호수 락블랑(Lac Blanc, 하얀 호수)에서 비박을 하는 멋진 경험을 했다. 이름처럼 새하얀 몽블랑(Mont Blanc, 하얀 산)을 배경으로, 저물어가는 알프스의 석양을 바라보던  꿈같은 순간. 같은 회사 동기로 만나 우정을 쌓았던 친구 SW과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며 직장 생활을 회고하고, 우리 시대 청춘의 아픔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이야기했다.

애귀뒤미디의 눈 덮인 능선을 오르는 등반가들 / Aiguille du Midi, Chamonix, Haute-Savoie, France (2015)
어릴적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서 본 듯한 아름다운 초원 / Les Chapieux, Bourg-Saint-Maurice, France (2015)
우리는 '더 나은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 Lac Blanc, Chamonix, Haute-Savoie, France (2015)


가치관을 공유하는 소중한 친구와 함께 한 여행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백패킹과 트레킹으로 보낸 9일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휴가를 내고 왔던 SW는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를 아쉬움 속에 보내고, 나는 며칠간 혼자 샤모니 계곡의 다른 2,000m급 봉우리들을 오르며 체력을 길렀다. 곧 내가 가장 기대하던 도전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몽블랑(Mont Blanc)(4,808m) 정상 등반이었다. 네팔에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통해 아웃도어 활동에 푹 빠지게 된 나는, 이번 알프스행을 결정하면서 몽블랑에 대해서도 약간의 공부를 했다. 그리고 이 곳을 오르는 데 등반(climbing) 기술이 필요하긴 하지만,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아 나 같은 초보자도 충분히 도전해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퇴사 이후에도 가슴속에 가득 차 있던 패배감과 우울함을 완전히 날려버리고 싶었기에, 나는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스위스 국경지대에서 2박 3일간의 등반교육(alpine training)을 통해 기본적인 장비 사용법 및 등반기술을 익힌 후, 총 4명의 다국적 대원 및 2명의 전문 산악가이드와 함께 몽블랑으로 떠났다.

로프와 하네스로 안자일렌(anseilen)을 하고 몽블랑을 오르다. / Mont-Blanc, Haute-Savoie, France (2015)


우리가 가게 된 코스는 제일 쉽다고 하는 구테 산장(Refuge du Goûter) 루트. 하지만 직접 올라 보니 생각했던 것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특히 첫 번째 산장인 테트 루스(Refuge de Tête Rousse)(3,167m)와 구테 산장(3,825m) 사이에 있는 70-80도 경사의 암릉 구간은 한 번 발을 헛디디면 수백 미터는 추락할 수 있는 위험한 곳이었다. 해발 3,000m 이상에서 나타나는 약간의 고소 증세에 히말라야 고산병의 추억을 상기하며, 로프에 발이 엉키거나 위에서 돌이 굴러 떨어지진 않을지 하는 엄청난 긴장감 속에 생애 첫 등반을 시도했다. 몽블랑이 알프스의 다른 고봉에 비해서는 비교적 쉽다고 하지만, 그래도 내가 알기로는 매년 최소 30-7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위험한 산이다.(영문 위키피디아에는 '매년 평균 1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고 나와 있다.) 심지어 안타깝게도, 내가 도전한 지 불과 며칠 만에 한국인 부부가 추락사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 <미주 한국일보 : 한인부부 몽블랑 등반중 사망> 2015-06-26  (금)
http://dc.koreatimes.com/article/20150626/926407


※ 아래는 직접 촬영한 테트루스-구테 산장 구간의 실제 헬멧 액션캠 영상 (HD 고화질/음향 필수)

테트 루스 산장(Refuge de Tête Rousse)에서 구테 산장(Refuge du Goûter) 가는 구간


고군분투 끝에 산장에 도착해 휴식을 취하고, 다음 날 새벽 고대하던 정상 공격에 나섰다. 불행하게도 등반 여건은 너무 좋지 않았다. 기상예보를 체크해온 가이드가 이틀 전부터 미리 예고했지만, 그 날 몽블랑에는 엄청난 바람과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만류에도 불구, 우선 공격 시도는 해보자고 하여 새벽 5시에 구테 산장을 나섰다. 2시간쯤 헉헉대며 올라 해발 4,000m를 넘어섰을까,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피부가 찢어질 듯 차갑고 강력한 바람이었다. 거기에 눈보라가 함께 날리자, 땅과 하늘이 모두 하얀색으로 보여 구분을 못하는 '화이트아웃(Whiteout)' 현상이 일어나 1m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미친 듯이 걸어서 겨우 몸을 피한 발로(Vallot) 무인 대피소(4,362m)에서 가이드는 결국 직권으로 하산을 결정했다. 수십 명에 이르는 다른 등반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풍속은 최대 시속 80km. 생전 처음 경험하는 무시무시한 바람 때문에 체감온도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몽블랑 정상만 이미 수십 번 오른 가이드의 판단대로 더 이상 올라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정상을 약 450m 앞두고, 그렇게 나는 또다시 산에게 뒷모습을 보여야 했다.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기 때문에 방법은 전무했다.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바람 속을 뚫고 몽블랑을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몽블랑 등반을 끝까지 함께한 영국군 장교 출신 Brad와 함께. (다른 2명은 모두 중도포기)


몽블랑 등정이 실패로 돌아간 후, 나는 속상함에 샤모니 숙소에서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다. 기본적인 주의사항도 지키지 않았던 칼라파타르와 달리, 몽블랑은 철저히 준비했는데도 실패했다. 100% 운에 불과한 '그날의 날씨' 때문에 그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 화가 났다. 직장 생활도 '실패'했다고 속으로 자책하던 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실패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속마음까지 털어놓을 수 있던 친구 SW가 떠난 후라 그런지 더욱 서글펐다. 그때 말동무가 되어준 사람이 한인 숙소에서 만난 동생 CH였다. 속 깊은 얘기까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을 많이 열었던 것 같다. 그는 알프스를 떠나 독일 여행을 생각하고 있던 내게, 자신이 아버지와 다녀온 오트루트(Haute Route, 高道)를 추천했다. 프랑스 샤모니에서 스위스 체어마트(Zermatt)까지 2주 동안 수많은 산을 굽이굽이 넘으며 190km를 걸어야 하는 트레킹 루트. 구글링을 해보니 꽤 난이도가 있는 코스인 것 같았다. 몽블랑도 등정하지 못했는데, 알프스를 떠나기 전 최소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6월 말, 마음을 굳힌 나는 배낭을 싸서 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고 2주 동안 25kg에 달하는 배낭과 사투를 벌이며 수없이 걷고 오르고 눈 속을 굴렀다. 눈 녹은 차가운 물로 몸을 씻고 성에가 끼는 텐트에서 밤을 보냈으며, 사람도 많이 없는 길이라 매일 방향을 잃고 산 속을 헤맸다. 낮에는 땀에 흠뻑 젖고 밤에는 배고픔과 추위에 떨면서, 나는 목적지인 체어마트를 향해 하루 10시간씩 걷고 걸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은 점점 편해졌다. 얼굴은 새카맣게 타고 살은 7kg 가까이 빠졌지만 무언가 이뤄가고 있다는 느낌에 눈빛만은 빛났다.

처음으로 얼어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해발 2,800m에서의 비박
오트루트는 완전히 '혼자'였기 때문에, 어쩌면 250km 사막마라톤보다도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2주가 지난 7월 초에 '좀비' 같은 몰골로 외롭게 도착한 체어마트. 계획한 대로 190km를 온전히 두 다리로만 걸은 후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터덜터덜 마을로 들어왔지만 나의 완주를 축하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행복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체어마트 뒤편에 우뚝 솟아 있는 마터호른(Matterhorn)(4,478m)을 보며,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순수한 감동의 눈물이었다. 퇴사한 후 처음으로, 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다짐했다. 난 현재의 내 모습과 상황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에 끊임없이 도전할 수 있는 그런 용감한 사람(勇士)이 될 것이라고.


'알프스 3대 미봉(美峰)'이라 불리는 그 당당한 산 앞에서, 나는 스틱을 집고 일어나 스스로에게 말했다. 퇴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강한 사람이라고, 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난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고. 무엇보다, 이제 다 괜찮다고 말이다.

마터호른 / Schwarzsee(Matterhorn), Zermatt, Switzerland (2015)


패배감과 우울함에 괴로워하던 스물아홉 청년 백수는, 그렇게 '용사(勇士)'로 거듭났다.


이제 알프스를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6)>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연재 순서

프롤로그 : 용사의 탄생

제 1편. 네팔과의 첫 인연 : '달밭킬러'가 된 해외봉사단원

제 2편. 히말라야 트레킹 도전기 : 에베레스트와 고추장아찌

제 3편. 헤어짐의 '너머스떼(नमस्ते)'

제 4편. 2015년, '퇴사'라는 모험

제 5편. 백수에서 '용사'로 : 극한의 알프스

제 6편. 프로젝트 #I'M GOING TO NEPAL의 탄생

 7편. 사막마라톤 훈련기 : 양재천에서 천왕봉까지

 8편.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리는 청년'이 되기 위해

 9편. 사막마라톤 전초전 : 바람의 땅 남미 파타고니아

 10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죽음의 계곡

 11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악마의 발톱

제 12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소금달의 별빛

제 13편. 사막마라톤 그 후 : 다시 '너머스떼(नमस्ते)'

에필로그 : 끝나지 않은 레이스





 <용사의 탄생>의 '서브 연재물'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시리즈 2010년도 해외봉사단원으로 네팔에서 활동했던 제가, 2015년 직장 퇴사 후 네팔 지진 피해 지원 후원금 마련을 위해 칠레 아타카마 사막마라톤에 도전한 소셜펀딩 프로젝트 #I'M GOING TO NEPAL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의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지난 이야기들을 구경해보세요.   

https://www.facebook.com/imgoing2nepal


 2015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의 진솔한 이야기를 유튜브 영상으로 먼저 확인해보세요.     https://youtu.be/ntiof25ZOrM

#I'M GOING TO NEPAL [아름다운 청년X아름다운커피]'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의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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