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그 첫 번째 이야기
네팔(Nepal, नेपाल), 세계의 지붕이라고 하는 히말(Himal/히말라야)의 땅이자, 1인당 GDP가 $700에 불과한 아시아 최빈국. 나는 그 나라의 이름을 들으면 새파란 하늘 아래 거대한 벽처럼 서있던 서거르마타(Sagarmatha/에베레스트)의 눈부신 설봉이 떠오른다. 그리고 수도 카트만두의 좁고 지저분한 골목 어귀에 모셔져 있는 거네스(Ganesh)신의 성상(聖像)과, 그를 물들인 선명한 붉은 염료가 눈 앞에 아른거린다. 마차푸츠레가 청명하게 비치던 아름다운 포카라의 페와 호수와 카트만두를 가로질러 흐르는 '쓰레기강' 바그머티(Bagmati)의 선명한 대비처럼, 네팔이라는 나라는 강렬하면서도 너무나 다른 수많은 '이미지'들의 총 집산으로 기억된다. 장엄하고 화려하면서 아름다워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좁고 더러우며 정신없어서 힘들다. 히말라야의 빛나는 해발 8,000m대 설산을 배경으로 바람을 가르는 오방색 룽다(Lungdar)는 가슴이 벅차지만,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 끔찍한 두통을 동반하는 고산병과 트레일을 가득 메운 야크(yak) 배설물로 질척해진 등산화는 영 불쾌하다. 그러나 그 감동과 불쾌함마저 모두 주저 없이 품고 싶은 나라, 네팔.
그런 네팔에서 내가 가장 소중하게 마음에 품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이미지의 부조화스러운 향연 속에서 내가 가장 기억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거대한 히말라야의 봉우리들도, 화려한 중세의 더르바르(durbar)도, 터멜(Thamel)의 이국적인 거리도 아니었다. '네팔'이라는 이름만 보아도 내 가슴을 떨리게 하는 것. 그건 아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내가 선명하게 기억하고 사랑하는, 네팔인들의 얼굴과 미소였으리라.
2010년 2월, 군대를 제대한지 딱 1년이 지났을 때였다. 대학교 3학년 학생이었던 나는 네팔로 떠났다. KOICA(한국국제협력단)이 후원하고 KCOC(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가 운영하는 '월드프렌즈NGO봉사단'으로, NGO에 소속되지만 정부(KOICA)로부터 생활비와 활동비 지원을 받으며 봉사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군 생활 도중 우연히 장 지글러의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을 보고, 개도국에 해외봉사단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해보겠다는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유명한 국제 NGO 등 수많은 단체에 지원했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는 문과 전공 대학생을 뽑아줄 만한 곳은 드물었다. 그러던 중 인터넷으로 통해 네팔에서 오랫동안 여러 의료 및 교육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로즈클럽인터내셔널'이라는 기관을 알게 되었고, 이 곳을 통해 장기 해외봉사단원으로 선발될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막연히 해외봉사가 가고 싶었기 때문에 굳이 '네팔'에 간다는 것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그리고 '봉사'를 해서 현지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싶다는 당찬 포부와 설렘을 동시에 안고 도착한 트리부번(Tribhuvan) 국제공항. 어두컴컴한 내부와 좁고 지저분한 구식 시설물 등 너무나 형편없어서 실소가 나오는, 한국의 시골 버스터미널보다도 안 좋아 보이는 공항의 황당한 모습이 내 24살 네팔과의 첫 만남이었다.
인터넷판 <국민일보> 2월 24일 자에 실린 장미회(現로즈클럽인터내셔널) 봉사단 파견 소식, 맨 왼쪽 24살의 풋풋한 대학생 청년이 본인이다.
네팔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특히 수도 카트만두 시내 풍경은 개도국 경험이 별로 없었던 나에게 있어 굉장한 시각적 충격이었다. 쓰레기로 뒤덮인 도로,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오래되고 지저분한 건물, 하늘을 덮다시피 널려있는 전신주 전선들. 비교적 큰 대로를 가더라도 곳곳에 구멍이 나 있는 차도에는 신호등이나 횡단보도도 하나 없이 온갖 차량과 사람이 뒤엉켜 무질서했으며, 걸어 다녀야 하는 골목골목은 거의 포장도 안 되어 흙먼지와 구정물이 가득했다. 최고의 쇼크는 카트만두의 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바그머티강. 인도의 갠지스(Ganga)강처럼 힌두교에서 신성시하는 네팔의 '젖줄'이지만, 지금은 막대한 양의 쓰레기와 생활폐수로 죽음의 강이 되어버린 강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차량과 오토바이, 특히 외국에서 싼 값에 수입해 온 폐차 직전의 트럭 등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인해, 대기 오염 역시 심각한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카트만두는 지명(Kathmandu Valley)에서 보듯이 계곡, 혹은 분지 지형으로, 오염물질과 미세먼지가 잘 빠져나가지 못하고 건기에는 비까지 내리지 않아 오염도가 더욱 심각하다. 타국의 사람, 언어, 문화 등에 굉장히 개방적이었던 나는 예상치 못하게 이런 점들이 크게 다가왔다.
도착하고 약 2주 이상은 현지 적응 기간이라고 해서 단원 업무를 바로 하지 않고 네팔에서 지낼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로즈클럽의 도움으로 살 집을 구하고 가구 등 생활용품을 장만했으며, 네팔의 문화와 언어를 공부했다. 나의 새로운 네팔 이름은 '비제이(Vijay, विजय)'. 물론 열악한 전기 사정으로 하루 반나절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키고 밤을 보내야 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현지 소장님과 단원 선배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처음 가졌던 막막함이나 두려움은 금세 사그라들었고 조금씩 네팔에 나를 맞춰 나갈 수 있었다. 다행히도 다른 한국 사람들보다 네팔어를 빨리 배우는 편이었기에 2주 만에 혼자 장을 보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공과금을 내는 것도 얼추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네팔 음식에 완벽하게 적응하여 많은 이들이 겪는 현지식에 대한 거부감 및 한식에 대한 그리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나는 로컬 식당에서 먹는 거의 모든 종류의 현지식을 거리낌 없이 먹어댔는데, 특히 그 어떤 한국인보다도 네팔인들이 매일 즐겨먹는 주식 '달밭'을 좋아했다. 심지어 한 달도 안 되어 완벽한 현지인 스타일로 달밭을 먹는 바람에 네팔인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말이다. 물론 현지식에 대한 나의 선호와 내 위장이 받는 충격은 별개였다는 것을 일러둔다. (약 한 달 간 매주 나는 설사를 했고, 설사를 하는 도중에도 무지막지하게 달밭을 먹어치워 주위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다행히 2달 이후부터는 적응이 되었는지 다시 설사에 걸리지 않았다.)
현지 적응을 마치고 4월부터 나는 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지원으로 설립된 종합학교인 소망아카데미(Somang Academy)에서 한국어 수업을 맡은 것이다.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영어로 이루어졌으나, 나이가 어린 초등학생 반에 갈 때나 네팔어와 상당한 유사성을 지닌 한국어 문법을 설명할 때는 되도록 네팔어를 쓰려고 노력했다. 기본적으로 어린 학생들은 한국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흔치 않은 '외국인(bidesh) 선생님'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내가 엉뚱한 네팔어를 할 때마다 깔깔거리며 웃어주었다. 비록 어린 학생들이었지만 우리말을 가르치면서 한국에 대해 알리는 것은 보람차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수업 시작 한 달 만에 직접 기초 한국어 교재를 만들고, 2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줄 교재를 인쇄하는 비용을 내 자비로 충당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교재까지 만든 김에 아예 동네 한국어 교실을 열어 관심 있는 청년들을 모아 일요일마다 무료로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5년 넘게 연락하고 지내는 내 가장 친한 네팔 친구 비카스(Bikash) 역시 여기서 만났다.
물론 활동은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맡은 학생들이 초등학생 고학년에서 중학생 정도였던 점을 고려할 때, 사실 한국어는 단순한 흥미 이상의 과목이 될 수 없었다. 고용허가제(EPS)의 한국어 시험을 통과해 한국으로 일하러 가야 하는 청년들을 모아 놓은 것도 아니고, 한창 어린 학생들에게 영어도 아닌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라고 어찌 뜬금없이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파견 전 내가 최소 고등학생들은 가르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울 동기가 거의 없는 어린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은 충분히 당황스러웠다. 직접 만든 교재로 목이 터져라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산만한 학생들 때문에 진도는 제자리 걸림이고 시간이 갈수록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떠나, 나의 활동이 진짜 네팔에 도움을 주는 그런 '봉사'인 지에 대한 회의감. 심지어 학생들을 몇 달 만나게 되고 6월이 되어 날씨가 더워지자, 정상적인 수업 진행조차 쉽지 않았다. 옛날 우리나라처럼 한 반에 최소 40명에서 60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형광등도 안 들어오는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체력적·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든 일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실 분위기 컨트롤은 어려워져만 갔다. 아직 교사의 체벌이 존재하는 네팔 학교에서 체벌하지 않는 외국인 선생님인 나는 아무래도 '만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고, 한 번은 수업시간 도중 참지 못하고 그대로 교실 밖에 나와서 속상한 마음에 숨어서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다. 이 먼 곳까지 스스로 와서 혼자서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해외봉사'를 왔으니 이 곳에 무엇인가를 '해주고 가야 한다'라는 사명감은, 평소 책임감 강한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는 것은 같은 학생들이었다. 말 안 듣고 떠드는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학생들도 있지만, 선생님의 기분을 맞춰주고자 일부러 크게 목소리를 내서 따라 하고 눈을 맞추고 웃어오는 착한 학생들이 더 많았다. 시끄럽게 떠드는 급우에게 '한국 선생님 힘드시니까 조용히 좀 해!'라고 소리치던 반장 여학생. 만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고사리손으로 날 껴안으며 '꼬리얀썰(Korean Sir)~!'이라고 불러 주던 저학년 아이들. 나한테 혼이 났다가도 나중에 스스로 교무실로 찾아와 미안하다고 훌쩍거리던 중학생 남자애. 눈을 반짝이며 '한국에는 고래가 있나요?' 등 이것저것 질문하더니, '선생님은 어떻게 이걸 다 알아요?'라고 물어보던 똘똘한 눈의 학생들. 교사라는 건, 특히 어린 학생들 50명과 겨루는 일은 분명 에너지 소모가 너무나 큰 힘든 직업이다! 그래도 날 '선생님'으로 생각하고 따라주는 학생들을 봐서라도 힘들다고 대충 할 수는 없었다. 해외봉사단 프로그램의 대표적인 문제점이기도 하지만 학교 측은 이러한 상황에 별 신경을 써주지 않았고,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는 내 수업을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기 힘들다는 것을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그래서 중간고사 이후부터는 내가 할 수 있고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하자고 마음먹었으며, 이에 커리큘럼을 자체적으로 수정하고 학교 측에 이를 통보하였다. 저학년 학생들은 우리나라의 신화(단군, 주몽, 허황후 이야기 등) 및 전래동화를 재미있게 소개하고 동요와 율동 등 놀이 위주의 수업을, 고학년 학생들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일종의 영어 보충수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다른 수업과 달리 '재미'를 목표로 한 나의 수업내용에 학생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고, 8-9월부터는 비교적 교사와 학생 모두가 만족하는 정상적인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편 학교에서의 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느낀 나는, 학교를 벗어나 내가 사는 동네에도 눈을 돌렸다. 당시 내가 살던 동네에 고아원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네팔 내전(1996-2006)' 당시 부모를 잃은 지방 출신 아이들 약 20여 명이 함께 지내는 곳이었다. 원생들 중 일부는 학교의 내 학생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함께 네팔에 온 동료 한국 단원과 고아들을 위한 주말 교실을 운영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원장과 상의하여 허락을 얻어냈다. 주말 교실의 이름은 'RCK(로즈클럽) 모바일 클래스(Mobile Class)'. 부모가 있는 다른 가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육과 놀이에 있어 소외된 고아들을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음악, 미술, 영어, 놀이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일종의 학습 교실을 운영하는 것이 주된 구상이었다. 이 역시 구상한 것만큼 쉽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저마다 내면에 상처가 있어서 그런지 친해질 정도로 다가가는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고, 고아원 원장은 우리를 만날 때마다 '도와주려면 돈이나 후원해달라'는 자세를 은연중에 내보이곤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터넷을 참고하여 커리큘럼을 짜고 매주 토요일마다 고아원을 방문해 4-5시간씩 아이들을 위해 모바일 클래스를 운영했다. 토요일마다 우리가 저 멀리 골목에서 모습을 보일 때부터 아이들이 모두 창가에 모여 손을 흔들어 주고, 나 역시 활짝 웃으며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주며 즐겁게 수업을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린 시절에 벌써 너무나 많은 일을 겪은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행복한 추억을 선사해주고 싶어서 시작했던 프로젝트. 그러나 해맑게 웃고 외국인인 나를 티 없이 따라주는 아이들 덕에, 사실 내가 가장 행복했었던 것 같다.
연재 순서
제 1편. 네팔과의 첫 인연 : '달밭킬러'가 된 해외봉사단원
제 2편. 히말라야 트레킹 도전기 : 에베레스트와 고추장아찌
제 6편. 프로젝트 #I'M GOING TO NEPAL의 탄생
제 8편.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리는 청년'이 되기 위해
제 9편. 사막마라톤 전초전 : 바람의 땅 남미 파타고니아
제 10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죽음의 계곡
제 11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악마의 발톱
제 12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소금달의 별빛
제 13편. 사막마라톤 그 후 : 다시 '너머스떼(नमस्ते)'
에필로그 : 끝나지 않은 레이스
■ <용사의 탄생>의 '서브 연재물'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시리즈는 2010년도 해외봉사단원으로 네팔에서 활동했던 제가, 2015년 직장 퇴사 후 네팔 지진 피해 지원 후원금 마련을 위해 칠레 아타카마 사막마라톤에 도전한 소셜펀딩 프로젝트 #I'M GOING TO NEPAL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의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지난 이야기들을 구경해보세요.
https://www.facebook.com/imgoing2nepal
■ 2015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과 #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의 진솔한 이야기를 유튜브 영상으로 먼저 확인해보세요. https://youtu.be/ntiof25ZO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