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그 두 번째 이야기
소망아카데미 수업과 고아원에서의 모바일 클래스 모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나의 네팔 생활은 안정을 찾았다.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친구들, 동료들도 만나고, 함께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녔다.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동료 단원들 아니면 네팔인들이었는데, 이는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인 커뮤니티에서 별로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무료 한국어 교실을 하면서 알게 된 같은 동네 네팔 청년들을 자주 만났다. 이들 중 아이돌 헤어스타일을 하고 매일 기타를 들고 다니는 '비카스(Bikash)'라는 동갑내기가 있었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친구가 되었다. 대학 때 밴드부를 했던 나는 기타를 잘 치는 그와 죽이 잘 맞아 <Hotel California> 같은 올드팝을 부르며 동네를 어슬렁거리곤 했다. 우리는 동네 노점에서 10-20루피(우리 돈 200원) 정도 하는 '빠니뿌리(양념한 감자 소를 넣은 과자를 식초에 적셔 먹는 길거리 음식)', '쩌뻣(매콤새콤한 소스와 야채를 버무린 튀밥)' 등의 군것질을 즐겨 먹었고, 작은 식당에서 '모모(네팔식 만두)'나 '쩌우멘(볶음라면)'를 사 먹었다. 또한 그는 정말 맛있는 '치킨 마살라'(커리 등 여러 향신료를 넣은 네팔식 닭볶음탕)를 요리할 줄 알았는데,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자기 집에 불러다가 음식을 해서 먹이고는 했다. 그는 신비할 정도의 따뜻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덕분에 일하는 것이 조금 힘들어도 비카스와 어울리며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덧붙여 영어를 잘 못했던 그였기에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100% 네팔어로만 이루어졌고, 자연스레 네팔어 실력도 많이 늘 수 있었다.
덥고 갑갑한 우기가 끝나고 날이 선선해지면서 네팔에 온지도 어느덧 반년이 지나갔다. 빗물이 항상 고여 있어 내가 '포커리(pokhari/호수)'라고 부르던 집 앞의 거대한 웅덩이가 사라졌고, 나는 더 이상 욕을 내뱉으며 쓰레기와 죽은 개가 떠다니는 비 오는 날의 골목을 첨벙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단원으로서의 활동에 욕심이 많았던 나는, 학교와 고아원 외에도 나의 재능을 활용할 수 있는 곳은 없을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심지어 네팔 지인들의 소개로 카트만두에 있는 한국어 학원 몇 군데에 스스로 찾아가, 그곳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네팔 젊은이들에게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등에 대한 '무료 특강'을 열기도 했다.
또한 네팔의 복잡한 정치 상황에 대해 추후 학교로 돌아가 논문을 써보자는 생각에, 수업이 없는 날에는 네팔의 정당과 정부 기관, UN 등 국제기구도 찾아다녔다. 네팔 내전을 통해 왕정을 붕괴시킨 네팔공산당(마오이스트)의 당사를 방문하여 고위급 인사와 대화를 나누었고, 전쟁 휴전 후 이를 감시하는 UN 조직 UN네팔임무단(UNMIN) 본부를 방문하여 공보관과 인터뷰를 했다. 이처럼 나는 끊임없이 눈과 귀를 열고 네팔의 언어, 종교,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을 배우고 이해하려 노력했고, 그럴수록 이 나라와 사랑에 빠졌다. 특히 꾸준히 네팔어를 공부하고 매일 사용하면서 실력이 더욱 향상되었다. 거기에 원래 까무잡잡한 얼굴이 더 까맣게 타면서, 점점 나의 외모는 네팔인처럼 변해갔다. '안녕하세요, 밥 먹었어요?' 같은 짧은 회화만 하면 사람들이 나를 같은 네팔인이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자주 가던 러건켈(Lagankhel) 시장에 장을 보러 나왔다가, 나이 많은 아주머니가 하시는 허름한 과일가게에서 즉석 생과일주스를 사 먹는데,
아주머니 : (거스름돈을 주며) "근데...... 네팔 사람이죠?"
나 : (장난 삼아) "넵, 구릉족이에요, 아주머니."
아주머니 : "그럴 것 같더라, 근데 말하는 걸 보니 외국에서 살다 왔나 봐요."
업그레이드된 네팔어로(혹은 업그레이드된 얼굴로) '절친' 비카스와 동네 네팔 친구들과 동네를 돌아다니며 빠니뿌리를 사 먹는 것은 여전히 즐거웠고, 동료 단원들과는 한국에서 보내주신 골뱅이를 무쳐 파티를 열기도 했다. 가끔씩은 한국 이주노동자 출신 네팔 형님들과 어울려 술 한잔 하며 신나게 한국어로 수다 떠는 여유도 부렸다. 여전히 불편했지만, 상당히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비록 친구들과 동네에서 노는 것을 선호하는 나였지만, 그래도 시간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여행도 다녔다. 카트만두 시내의 유명한 유적은 물론, 정글 트레킹으로 유명한 남부의 치트완(Chitwan) 국립공원과 부처의 탄생지로 알려진 불교 성지 룸비니(Lumbini)를 방문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기대했던 것은 히말라야에서 트레킹을 해보는 것이었다. 알프스를 등반하고 250km 사막마라톤을 완주한 지금과 비교해본다면 너무나 놀랍게도, 이 당시 나는 등산이나 운동에 큰 관심이 없었다. 비록 네팔에 와서 호기심이 생기긴 했지만 트레킹 역시 치트완에서 코뿔소 보는 것처럼 '관광'의 측면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9월 경 외국인 친구와 함께 도전한 안나푸르나(Annapurna) 트레킹에서 완전히 바뀌고 만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 부모님과 서울 수락산 정도 올라본 게 다였던 내가, 히말라야 고봉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직접 보고 완전히 충격을 받아버린 것이었다. 비록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친구의 여행 일정을 맞추기 위해 2박 3일로 해발 3,200m 밖에 안 되는 푼힐(Poon Hill)까지만 간 게 다였지만, 전망대에서 본 히말라야의 자태는 태어나 처음 접하는 압도적인 풍광이었고 내게 너무나 새로운 세계임이 분명했다. '난 꼭 저 곳을 가야 해.' 푼힐을 오르며 새하얀 마차푸츠레(Machapuchare)를 처음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외친 말이다. 친구와 하산하는 동안에도 나의 머릿속은 온통 히말라야에 대한 생각뿐이었고, 이왕 갈 거라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Everest)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 전까지 여자 단원들보다도 히말라야 트레킹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던 나는, 카트만두로 돌아온 즉시 동료 누나/여동생을 끌고 '네팔의 이태원' 터멜로 나가 여행사와 장비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10월 중순, 네팔의 최대 명절인 더사인(Dashain) 연휴를 맞아 각종 식량과 등산용품으로 가득 찬 배낭을 메고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가 있는 서거르마타(Sagarmatha/에베레스트)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아침 일찍 카트만두 트리부번에서 국내선 경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에베레스트의 관문 '루클라(Lukla)'. 해발 2,850m에 위치한 조그마한 공항은 트레킹 시즌을 맞아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트레커와 산악인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나 역시 이제껏 해보지 않은 대단한 모험을 떠난다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공항 밖으로 나서자마자 함께 할 포터 겸 가이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까맣게 타고 주름진 얼굴. 히말라야 포터의 힘든 삶이 그대로 묻어있는 모습이지만, 나이는 내 또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나이와 관계없이 경험 많은 포터를 '다이(daai/네팔어로 형·오빠)'라고 부르기로 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짐을 정리한 후, 상기된 얼굴로 12일간의 에베레스트 트레킹의 첫 발을 디뎠다. 아직은 공항과 가까워서인지 마을들을 따라 한참 가야 했고, 많은 현지인들을 볼 수 있었다. 매일 같이 보는 외국인들일 텐데, 많은 이들이 우리를 향해 미소 짓고 너머스떼(Namaste) 하고 인사를 건네주었다. 위도는 낮지만 고도가 높아 카트만두에 비하면 기온이 많이 낮은 편이었고, 주변 식생은 네팔의 남부 지역과 너무나 달라서 꼭 한국의 숲을 보는 듯했다. 루클라를 떠난지 몇 시간 동안은 약간 내리막 위주의 길을 걸었고, 해가 지기 전 다이의 안내에 따라 팍딩(Phakding)(2,640m)의 첫 롯지(lodge)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이번 트레킹의 최종 목적지는 칼라파타르(Kala Patthar/네팔어로 검은 바위)(5,545m), 흔히 'EBC'라고 불리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Everest Base Camp)(5,364m)와 함께 트레커들이 많이 가는 대표적인 트레킹 루트로 에베레스트 경관을 쉽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다이는 이 곳까지 오르는데 약 8일을 계획했는데, 사실 난 처음에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칼라파타르가 위치한 5,500m의 고도는 살면서 흔히 접하기 힘든 높이긴 하지만 우리가 해발 0m부터 5,500m까지 오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작 지점인 루클라 공항이 벌써 해발 3,000m 정도 되니 사실 약 2,500m 정도만 올라가면 되었다. 한국에 있는 산이라면 최소 이틀이면 다 오를 수 있는 높이. 나는 하루라도 빨리 눈을 볼 수 있는 고산지대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둘째, 셋째 날 트레킹을 계속하면서 몸이 풀리자 헉헉 대며 속력을 높였고, 동료들, 포터 다이보다 먼저 올라가서 그들이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고는 했다. 이때만 해도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물론 다이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특히 둘째 날 남체 버자르(Namche Bazaar)(3,440m)를 지나 셋째 날 텡보체(Tyengboche)(3,867m)에 가까이 왔을 때, 그는 내가 너무 빨리 산을 탄다며 주의를 주었다. 고산병의 위험 때문에 하루에 조금씩 천천히 산을 올라야 하고, 숨이 가쁘고 땀이 날 정도로 급히 올라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의 빠른 등산 페이스는 바뀌지 않았는데, 첫 번째로 내가 전형적으로 성격과 걸음이 모두 빠른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두 번째로는 사실 내가 당시 다른 동료 여자단원들보다 훨씬 빠르게 산을 오르는 걸로 약간 우쭐대고 싶었던 점(굉장히 부끄러운 이유임이 분명하다)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이는 나한테 최대한 주의를 주려 했지만, 내가 말을 듣지 않자 더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의 빠른 산행 속도와 고집 말고는, 우리는 전혀 부딪힐 일이 없었다. 다이는 네팔어도 할뿐더러 네팔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을 매우 좋아했고, 우리 역시 성실할 뿐만 아니라 친절한 그와 금세 친해졌다.
다이는 텡보체부터 우리가 더 천천히, 조금만 가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하루에 길어봤자 4-5시간씩, 천천히 걸어서 고소에 적응하면서 산을 올라야 한다고 것이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소 해발 3,500m부터 조금씩 저산소로 인한 고산 증세를 겪는다. 사흘 동안 새끼 야크처럼 트레일을 뛰어다니던 나 역시 평소보다 숨이 더 가빠지고 머리가 울리는 등 신체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동료들과 페이스를 맞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날 도착한 롯지에서 생애 첫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위기로 몰고 간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는 롯지 식당에서 저녁밥을 먹고 있었는데, 나는 평소에 즐기는 것처럼 네팔식 고추장아찌를 부탁해 밥과 함께 맛있게 먹는 중이었다. 그러다 매워서 땀이 흐르길래, 그걸 닦으려다가 고추장아찌 국물이 묻은 손으로 눈을 만지고 만 것이다. 엄청나게 매운 네팔 고추는 내 눈을 통해 지옥을 보여주었다. 나는 롯지 밖에 있는 세면대로 뛰쳐나갔고 몇 분 동안이나 미친 듯이 세수를 하였다. 잠시 나와 있었지만, 얼음장 같은 찬 물로 세수를 하고 히말라야의 찬 밤공기에 땀이 식으면서 순식간에 몸이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따라 나온 다이는 자기가 여기서는 찬 물로 세수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냐며 화를 내었으나, 눈도 뜨지 못했던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상황. 당연하게도 그날 밤부터 옅은 두통과 함께 오한이 찾아왔고, 아침에 일어나자 목에 염증이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감기 증상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불행히도 트레킹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온 몸이 무거워지고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고, 다이는 고산병이 우려된다며 누구보다 내 상태를 염려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팡보체(Pangboche)(3,985 m)를 지나 딩보체(Dingboche)(4,530m)를 가면서 심한 두통이 시작되었고 내 걸음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딩보체에 겨우겨우 도착했을 때, 나는 목감기, 몸살과 그로 인해 탄력 받은 고산 증세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루를 아예 쉬기로 결정했다.
트레킹 자체는 어렵지 않다. 전문적인 등반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두 다리와 등산화 같은 필수 장비만 있으면 된다. 하루에 500m 이하, 5-7시간 밖에 걷지 않는다. 그러나 고산병에 한 번 걸리면 끝이다. 약이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나으려면 밑으로 내려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딩보체에서 하루를 아예 쉬면서 항생제를 먹었더니 감기는 나았지만, 함께 시작된 두통은 통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선은 다음 마을까지 더 올라가기로 하고 다음날 아침 다시 길을 나섰으나,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계속 뒤쳐졌다. 인생의 '모험'에 설레던 마음은 순식간에 고통과 우울함으로 가득 찼다. 처음부터 나의 증상을 염려하던 다이는 끊임없이 나의 상태를 물어보고 나와 함께 걸어주었다. 생각해보면 다이가 하지 말라고 한 것만 골라한 셈이었다. 고산병은 높은 고도의 낮은 산소농도에 몸이 적응하지 못하면서 생기는 증상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건강하고 활동적인(즉 신진대사가 활발하고 산소 소모량이 많은) 10-20대가 남성이 더 쉽게 걸린다고 한다. 나는 쓸데없는 자신감에 숨이 찰 정도로 빨리 올라가며 무리를 했고, 밥도 많이 먹었으며, 추운 밤에 찬 물로 한참을 세수하면서 갑자기 머리의 혈관을 수축시켰다. 에베레스트까지 와서 고작, '고추장아찌' 때문에 고산병에 걸리다니! 후회가 밀려왔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말을 참 안 듣는 고객이었는데도 불구, 다이는 나를 너무도 잘 챙겨주었다. 그는 짐을 나눠서 들어주었고, 롯지에서 뜨거운 물을 가져다주었다. 또 주위 다른 가이드를 통해 잘 듣는다는 약도 가져다다 주었으며, 잠시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도록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다. 나는 그의 말투와 행동에서, 그가 나를 친구로서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함께 간 동료들도 물론 그렇게 해주었지만, 네팔인 포터가 처음 만난 외국인 고객일 뿐인 나를 위해 그렇게 신경 써주는 게 내심 고마웠던 것 같다. 처음 겪는 고산병은 너무나 괴로웠지만 그 덕분에 마음만은 따뜻했다.
그렇게 이틀을 고통 속에 걸어, 우리는 여덜째날 칼라파타르 및 EBC 가기 전 마지막 마을인 고락셉(Gorak Shep)(5,164m)에 당도하였다. 고도 5,000m가 넘어서자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다이는 내일 새벽에 400m만 더 오르면 칼라파타르라고 하면서, 도전을 하는 것은 말리지 않겠지만 정 안될 것 같으면 자신한테 솔직히 말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침대에 누워있어도 사정없이 두근대는 심장, 누가 머리를 드릴로 뚫고 있는 것 같은 극심한 두통, 수면 부족에 식욕까지 없는 내 상태는 스스로 봐도 꽤나 심각한 상태였다. 나는 다이의 어깨를 꼭 잡으며 알겠다고 말했다. 아무리 괴로워도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불경이 적힌 룽다를 바라보며 에베레스트의 산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연재 순서
제 1편. 네팔과의 첫 인연 : '달밭킬러'가 된 해외봉사단원
제 2편. 히말라야 트레킹 도전기 : 에베레스트와 고추장아찌
제 6편. 프로젝트 #I'M GOING TO NEPAL의 탄생
제 8편.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리는 청년'이 되기 위해
제 9편. 사막마라톤 전초전 : 바람의 땅 남미 파타고니아
제 10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죽음의 계곡
제 11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악마의 발톱
제 12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소금달의 별빛
제 13편. 사막마라톤 그 후 : 다시 '너머스떼(नमस्ते)'
에필로그 : 끝나지 않은 레이스
■ <용사의 탄생>의 '서브 연재물'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시리즈는 2010년도 해외봉사단원으로 네팔에서 활동했던 제가, 2015년 직장 퇴사 후 네팔 지진 피해 지원 후원금 마련을 위해 칠레 아타카마 사막마라톤에 도전한 소셜펀딩 프로젝트 #I'M GOING TO NEPAL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의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지난 이야기들을 구경해보세요.
https://www.facebook.com/imgoing2nepal
■ 2015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과 #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의 진솔한 이야기를 유튜브 영상으로 먼저 확인해보세요. https://youtu.be/ntiof25ZO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