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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javenture Jan 12. 2016

헤어짐의 '너머스떼(नमस्ते)'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그 세 번째 이야기


제대로 끝맺지 못한 헤어짐은, 필히 아쉬움을 남긴다. / Gorak Shep, Khumbu Himal, Nepal (2010)


트레킹 아홉째 날인 다음 날 새벽,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나와 등산화를 신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는 깨질 듯했다. 스트레스성 편두통, 숙취, 차멀미 등 온갖 종류의 두통이 합쳐진 듯한 괴로움. 며칠째 이 두통 증세 때문에 잠을 거의 못 자고 있었는데, 그 날 역시 저녁부터 새벽까지 수많은 생각으로 뜬 눈으로만 밤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문인지 내 앞에서 분주히 마지막 등산을 준비하는 다이의 모습조차 슬로우 모션인 듯 몽롱하게 보였고, 다리에 힘을 주고 설 기력도 없었다. 등산화 끈을 모두 묶고 헤드랜턴을 머리에 단 후 잠시 눈을 감았다. 헬기를 타고 내려가는 나의 모습을 1753번째 상상하려던 찰나, 다이의 재촉으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라파타르를 향한 최후의 고군분투 / Gorak Shep, Khumbu Himal, Nepal (2010)


우리는 고락셉의 롯지를 떠나 칼라파타르(5,545m)를 오르기 시작했다. 고산병으로 완전히 약해진 나는 수많은 트레커들에게 길을 내주면서, 이를 악물고 한 발 한 발을 내디뎠다. 정말 괴로웠지만 조금만 더 가면 목표라는 생각을 하며 젖 먹던 힘을 냈다. 그러나 약 2시간쯤 걸려 100m 좀 넘게 올랐을 때 결국 한계가 왔다. 더 가다가는 머리가 펑하고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들었다. 이러다 죽는 것 아닐까. 일시적인 고통에 의한 두려움이라고 보기에는 스스로 느껴지는 상태가 너무나 심각했다. 성공에 대한 욕심으로 무리한 시도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곳에 올라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무엇보다 창창한 앞으로의 삶 동안, 다시 도전할 날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했던 것이 '칼라파타르 도달'만은 아니었잖아. 난 마음을 굳히고 멈춰 서서 앞서 가는 동료들에게 하산하겠다고 소리쳤다. 다급하게 내게 다가온 단원들과 다이는 예상했다는 듯이 수긍했으나, 내가 그 누구보다도 성공하고 싶어 했던 것을 알기에 모두들 많이 아쉬워했다. 그 동안 나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다이가 특히 안타까워했다. 그는 가까이 다가와 여기서 내려가는 것도 대단한 '용기(bahadur)'라고 힘주어 말했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 여기까지 함께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미련 없이 뒤로 돌아섰다. 모두가 칼라파타르를 향해 올라가고 있던 그 이른 아침, 내려오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실패했다는 생각에 너무도 비참했다. 한 서양인 트레커는 내가 칼라파타르를 이미 다녀온 줄 알고 나에게 어떠냐고 쾌활하게 묻기까지 했다. 나는 눈도 마주 보지 않고 영어로 'Great.'라고 내뱉은 후 그를 스쳐 지나갔는데,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려가서 2시간쯤 멍하니 기다렸을까, 무사히 칼라파타르를  다녀온 단원 동료들과 다이가 돌아왔고 우리는 내 고산병 증세를 고려,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최대한 빨리 하산하는 바람에 이틀 만에 루클라로 돌아올 수 있었고, 5일 동안 나를 괴롭히던 끔찍했던 두통은 어이 없을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의 에베레스트(칼라파타르) 트레킹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우리는 그간 고생한 다이에게 팁을 두둑이 챙겨주었고, 악수를 하고 또 뜨겁게 안고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다이는 내게 히말라야를 오르는데 있어서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작은 먼지와 같다고 말했다. 나이 답지 않게 울림 있는 그의 조언에, 나는 더 이상 아쉬워하거나 후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이에게 그래도 다음에 다시 도전할 테니 함께 가 달라고 말하자,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OK라고 말했다.  

동료 누나의 카메라에 담긴 나의 마지막 뒷모습. 쓸쓸하고 아쉬웠던 순간. / Gorak Shep, Khumbu Himal, Nepal (2010)


에베레스트 트레킹은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첫 '모험(adventure)'이었다. 24살이라는 젊은 인생에서 별로 경험해 본 적 없는, 스스로 결정하고 시도했던 강렬한 '도전'이었다. 동시에 어릴 적부터 책만 읽던 전형적인 모범생이었고 군대조차 행정병으로 복무했던 내가, 자의로 맞닥트린 첫 신체적·정신적 한계였다. 비록 목표했던 칼라파타르까지 오르는 데는 실패했지만, 실패가 불가피한 한계점까지 최선을 다해 도전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9일간의 고생 끝에 올라간 해발 약 5,300m 지점. 그곳까지의 노력이 의미있었던 만큼, 필요할 때 포기하고 내려오는 용기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남은 유일한 아쉬움은 딱 하나. 우리 '다이'의 본명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인지 그가 더욱 그리운 건지도 모른다. 덧붙여 에베레스트 트레킹을 계기로 난 산을 포함한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푹 빠졌고, 그 이후로도 등산, 트레킹, 백패킹 같은 야외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카트만두로 돌아온 10월 말, 더사인 연휴가 모두 끝나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연휴가 끝난 다음날 아침 출근하기 전 달력을 보며 귀국까지 남은 약 2개월 반을 끝까지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보내자고 스스로 마음먹었다. 학교에 돌아가 보니 저학년 학급에서 나는 에베레스트 정상(8,848m)을 정복한 '위대한 모험가' 꼬리얀 썰이 되어 있었다. 에베레스트 트레킹 간다는 소문이 지나치게 와전되어버린 것. 그 때문에 가는 곳마다 정정 안내를 해야 했다는 것을 말해둔다. 그렇게 다시 학교 수업을 나가고 토요일에 고아원을 찾았으며, 일요일에는 비카스를 오랜만에 만나 함께 맛있는 달밭을 먹었다. 히말라야의 지독한 고산병과 칼라파타르를 목전에 두고 삼켰던 아쉬움은 집에 돌아오자 순식간에 잊어버린 것 같았다. 여전히 까불고 떠드는 학생들은 한 대 쥐어박고 싶었고, 20명의 고아원 아이들과 5시간을 함께 있으면 온 몸이 녹초가 되었지만 그래도 떠나는 날까지 항상 활기차고 친근한 '꼬리얀 썰' 비제이로 남아, 끝나는 날까지 마무리를 잘 하고 싶었다.

11월부터 학교에서도 보이던 히말라야. 실패했지만 더 이상 아쉬움은 없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네팔과의 이별이 찾아왔다. 에베레스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11월 중순,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국으로 급히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안타까운 상황이었고, 또 사실 후회되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꼭 중도 귀국을 해야 했던 사정이 있었다.


급한 귀국으로 이별 역시 급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걱정했던 것은 남은 수업과 내가 해오던 일들. 다행히 겨울방학까지 얼마 남지 않은 학교 수업과 고아원 모바일 클래스의 마지막 교실까지 동료 단원 여동생 SH가 맡아주기로 했다. 마지막 수업 날, 학생들에게 떠난다고 말했을 때는 목소리가 떨렸다. 너무나 속을 썩였던 아이들인데 막상 다시 못 볼 수도 있다고 하니까 코 끝이 찡해졌다. 가르친 학급 모두 단체 사진을 찍고 학생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그들의 앞길을 위해 진심으로 축복해주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도와주신 선생님들, 버스 기사 아저씨께 감사를 표하고, 가끔 점심 먹고 음료수 한 병씩 사서 찾아갔던 학교 수위 아저씨께도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비카스를 포함한 네팔 친구들과는 골목길을 함께 걸었고 이제껏 그랬듯이 빠니뿌리를 함께 먹으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너무나 아꼈던 고아원 학생들에게는 내가 네팔에 가져온 옷가지 전부를 주며, 미술시간에 그렸던 꿈을 꼭 이루기를 진심으로 기원하였다. 로즈클럽 소장님, 동료 및 선배 단원들, 10개월 간 산 우리 집주인 아주머니, 청소하시는 어머니, 동네 슈퍼 아저씨, 항상 수줍어하며 나와 눈이 마주치면 도망가던 동네 소녀까지, 아쉽지만 웃는 얼굴로 헤어짐의 '너머스테(नमस्ते)'를 말했다. 공항으로 떠나는 차에서, 내가 살았던 동네 럴릿푸르(Lalitpur) 쌈팡촉(Sampang chowk), 마이크로(봉고차 버스)와 템포(소형 삼륜차)를 타고 지나다니던 그 삼거리(chowk)를 얼마나 뚫어지게 쳐다보았는지 모르겠다.



10개월 간의 짧은 네팔 생활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즐겁게 보냈지만 쉬운 것만은 아니다. 글로 그리는 불편함과 실제로 겪는 불편함은 전혀 다르다고 장담한다. 그래도 나는 행복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순전히 바로, '해외봉사'라는 이름으로 내가 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던 그들의 관심과 사랑 덕분이었다. 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내가 네팔에서 해외봉사를 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대단하다, 훌륭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너무 부끄럽다. 나야말로 너무 많은 것을 그들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학교 식당에서 배식을 담당하셨던 아주머니, 아름다운 미소만큼이나 밥을 넉넉하게 퍼주셨다.


처음 네팔에 왔을 때, 나 역시 봉사단원들이 흔히 착각하듯 가난하고 개발이  덜된 네팔을 '시혜'의 대상으로만 보았다. 그래서 한국이라는 발전된 선진국에서 온 내가 '희생'하여 그 네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어야 하고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는 오만할 수밖에 없었고, 만나는 모든 현지인들을 제멋대로 재단하고 계산하고는 했다. 한편으로는 또 내가 가진 재능의 한계와 나를 둘러싼 상황의 제약 때문에 스스로 끊임없이 힘들어했다. 그런 나를 처음부터 '외국인'이나 '한국인', 혹은 '봉사단원'으로만 대하지 않고,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 대 사람'으로 보아 준 것은 항상 네팔 사람들이었다. 동네 친구부터 시골 촌부까지, 시장 상인부터 히말라야 포터까지.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언제나 친절하고 솔직하며 당당한 네팔의 사람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나의 해외봉사단 생활은 사실, 그런 그들과 내가 함께 나누고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와는 다른 그들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왜 네팔에서는 이렇게 하는지 이해가 안 돼, 이건 무조건 한국처럼 바꿔야 해'가 아니라, 그들 나름의 합당한 이유와 논리를 먼저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비카스를 비롯한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군것질(쩌뻣)을 먹던 추억,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난 가끔 자문한다. 네팔보다 우리가 더 발전된 나라인가? 한국은 네팔보다 더 나은 사회인가? 한국인은 네팔인들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 '경쟁과 두려움'밖에 기억할 수 없던 학창생활과 '전쟁'과도 같던 구직을 마치고 취직했던 나, 허례허식과 비효율, 장시간 노동이 강요되는 직장생활에 실망하여 우울증까지 왔던 나로서는, 한국이라는 사회가 네팔이라는 사회보다 모든 면에서 '발전'되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네팔을 '개발(development)'해서, 한강의 기적처럼 '바그머티의 기적'을 이룸으로써 '또 다른 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의 시각에 나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10개월이라는 시간은 한 국가, 한 사회의 장단점을 100% 파악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시간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24살에 개도국 생활을 처음 해 본 젊은 대학생이, '우리가 너희보다 낫다'라는 잘못된 선입견 및 시각의 위험성을 깨닫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난 우리나라가 네팔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이 나라를 한국처럼 만들고 싶지는 않다.


네팔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더르바르나 유명한 불교 사원, 거리의 원숭이가 아니라, 내가 비록 이방인이었음에도 발 붙이고 밥을 지어먹던 우리 동네와 내가 일했던 학교,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이었다. 베푸려고만 왔던 철없던 나에게, 조건 없는 친절과 사랑을 베푼 네팔 사람들이었다. 내 가슴에 깊게 담은 것은 히말라야의  설산뿐 아니라, 그 산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우직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포터 '다이' 같은 평범하고 순박한 네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언제나 순수한 미소로 합장하며 내 이름 '비제이'를 불러주던 네팔리(Nepali, नेपाली)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너머스떼(नमस्ते), 네팔!


행복했던 봉사단 생활을 마치고 떠나는 비행기에서, 나는 고산병으로 칼라파타르를 문턱에 두고 내려와야 했던 아쉬움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먼지로 뒤덮인 카트만두 시내를 내려다보며 더 나은 네팔을 기원함과 동시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당시에는 5년 만에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4)>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연재 순서

프롤로그 : 용사의 탄생

제 1편. 네팔과의 첫 인연 : '달밭킬러'가 된 해외봉사단원

제 2편. 히말라야 트레킹 도전기 : 에베레스트와 고추장아찌

제 3편. 헤어짐의 '너머스떼(नमस्ते)'

제 4편. 2015년, '퇴사'라는 모험

제 5편. 백수에서 '용사'로 : 극한의 알프스

제 6편. 프로젝트 #I'M GOING TO NEPAL의 탄생

 7편. 사막마라톤 훈련기 : 양재천에서 천왕봉까지

 8편.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리는 청년'이 되기 위해

 9편. 사막마라톤 전초전 : 바람의 땅 남미 파타고니아

 10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죽음의 계곡

 11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악마의 발톱

제 12편.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250km 도전기 : 소금달의 별빛

제 13편. 사막마라톤 그 후 : 다시 '너머스떼(नमस्ते)'

에필로그 : 끝나지 않은 레이스





 <용사의 탄생>의 '서브 연재물'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 시리즈 2010년도 해외봉사단원으로 네팔에서 활동했던 제가, 2015년 직장 퇴사 후 네팔 지진 피해 지원 후원금 마련을 위해 칠레 아타카마 사막마라톤에 도전한 소셜펀딩 프로젝트 #I'M GOING TO NEPAL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의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지난 이야기들을 구경해보세요.   

https://www.facebook.com/imgoing2nepal


 2015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과 #I'M GOING TO NEPAL 프로젝트의 진솔한 이야기를 유튜브 영상으로 먼저 확인해보세요.     https://youtu.be/ntiof25ZOrM

#I'M GOING TO NEPAL [아름다운 청년X아름다운커피]'네팔을 위해 사막을 달린 청년'의 아타카마 사막마라톤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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