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기회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현실로 실현된 적은 없었다. 그러다 마흔이 넘어서 남편의 일로 언어도 인종도 다른 곳에 터를 잡게 되었다. 준비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자의가 아니었기에 가족들과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타국 생활은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나라는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내 이름 석 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사춘기를 겪는 소녀처럼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다. 남의 나라에 오니 언어가 다른 건 물론이고 그 어디에도 나 자신이 없다는 것이 나를 무척이나 힘겹게 했다. 다이어리는 그간 줄곧 쓰고 있었지만 내 마음을 토로하기 위한 창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일기장을 새로 만들어 그곳에 온 마음을 글로 표현했다. 때로는 길고 긴 문장으로 주절주절 때로는 임팩트 있지만 짧고 간결하게. 그렇게 쏟아내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느 날은 한글 일기로 어느 페이지는 영문일기로 그림을 도 그리고 스티커들로 꾸며주기도 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동안 보낸 시간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시간은 차츰 일상의 비타민이 되었고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이 되었다. 표현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내 안의 것을 게워낸다는 것은 다를 바가 없었다.
불안한 내 마음을 편하게 해 보고자 필사를 시작했다. 그런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시작한 필사는 나의 마음을 순식간에 평안케 해 주었다. 글을 베끼는 것만도 좋은데 여백에 그림을 그리거나 꾸미기까지 하면 그 만족감은 배가 되었다. 그 여정은 낭독하는 작업으로 확장되었다. 게다가 그 페이지를 낭독하기라도 하면 힐링 그 자체였다. 좋은 기운들을 온전히 내 몸속으로 들이붓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온몸의 전율이 돋았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본연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가끔씩 인스타에 올리기 시작했던 낭독 포스팅에 내 목소리가 편안함을 준다고 했다. 많이 위로받고 간다는 댓글들도 늘어났다. 안식처와 같이 힐링이 된다는 소리 또한 자주 듣게 되었다. 내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고 싶었다. 위로의 손길이 되어 아픈 영혼들을 보듬어 주고 싶은 꿈이 생겨났다.
나는 각막으로 인해 한동안 일상생활이 어려웠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다꾸였다.
손 발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때 그 심정은 내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눈 자체를 쓰면 안 되었기에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쓰는 것은 물론 눈 뜨고 있는 시간을 줄여야 했다. 몸과 마음은 이상이 없는데 누워있어야만 하는 생활이 힘들었다.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만 갈수록 무기력해져만 갔다. 우울함이 극으로 치닫게 될 즈음 다행히 조금씩 안정되었다. 그 무렵 만난 다꾸는 내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때는 이것마저 안 하면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재료들을 이것저것 붙이다 보니 내가 보기에도 그럴싸한 게 나왔다. 평소에 느끼지 못한 기쁨이었다. 다행히 이 작업은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게 아니라 눈에도 크게 무리되지 않았다. 무조건 약 넣고 쉬어야만 했던 내게는 또 하나의 탈출구가 되어주었다.
다꾸를 하면서 무료했던 내 일상도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많게는 하루 2-3 작품 적게는 하루 한 작품씩 하게 되었다. 나는 곧 다꾸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가족들의 관심과 지원도 점점 늘어났다. 우울하기만 했던 시간들이 다꾸 덕분에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그런 날 보며 남편은 내게 힘을 주기 위해 다이어리 열 권하면 전시회 열어줄게라고 제안했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새 또 다른 나의 꿈이 되었다.
' 미술도 한번 배워보지 못한 내가 전시회를 한다고? '
막연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어느새 내 가슴은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지인의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갔을 때 나도 이런 전시회를 열어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좋겠다 하며 동경했었다. 나의 생각이 온 우주의 기운을 잡아당긴 것일까? 내가 상상했던 일이 현실에서도 이루어진다면 과연 어떨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상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내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언젠가는 꼭 하겠노라 다짐했다. 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냥 재료들을 믹스매치 한다는 개념으로만 했었다. 때로는 그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나 전시회라는 큰 꿈을 안고나니 작품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변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잘하려고 하니 자꾸 힘이 들어갔다. 즐겁기만 했던 다꾸가 어느새 어렵기만 했다. 창작의 고통이라는 예술가의 고뇌가 무언지 그때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전시회라는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퀀텀점프 할 수 있었다. 다양한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다.